시나리오 마스터
시나리오 마스터
십년 가까이 내게 시나리오 교과서는 맥기가 쓴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였다. '스토리'라는 원제에 걸맞는,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통찰은 어떤 저작도 쉽게 넘보기 어려운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맥기가 원칙의 토대를 다진 위에, 실천 강령으로 삼을 만한 책을 뒤늦게 발견했다. 데이비드 하워드의 '시나리오 마스터'는 그 부제 '필름 스토리텔링의 건축학'처럼, 맥기가 근원의 물리학을 얘기했다면 그를 구체화시킬 건축학을 얘기하고 있다.
이 책이 국내에서 발간된 것이 1999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산 것이 아마도 2010년 즈음이지 싶다. 발간 후 10여년이 지나서야 읽었으니 꽤나 늦게 본 셈이다. 전공자치고는.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워낙에 시나리오 작법책들이 흔한 데다가,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고 작법을 가르칠만한 제대로 된 책은 별로 없다는 생각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이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이 워낙 잘 쓴 책이라 다른 책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있다.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부제 때문이다. '스토리텔링' 당시 내 고민은 - 지금도 여전하지만 스토리와는 별개로 스토리텔링은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 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의 간극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갈수록 매체가 다양해지고, 수용자들의 참여도, 이해도가 커지는 시대에서는 뒤처질 수 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
기대만큼이나 이 책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유용한 지침들을 제시해 준다. 가장 속이 시원했던 것은 철저하게 수용자의 관점에서 스토리텔링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용자들이 어떻게 느낄 것인가? 그들에게 어떤 체험을 전해줄 것인가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클라이막스'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도 그런 관점 탓이다. 어떤 '절정'을 연상케 하는 이 단어가 관객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취향을 획일화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밋밋한 경험도 대단원을 장식할 수 있고, 스펙터클이 항상 결말에 놓이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여러가지 유용한 관점들과 시사점들을 제시해주고 있어서 한번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잠시 다른 책을 읽고는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주요 사항들을 체크리스트로 정리해봐야겠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 중의 하나는 '서브 플롯'에 대한 설명이다. 이전까지 플롯은 인물과 인물의 사이, 즉 갈등이 생겨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생각했었는데. 하워드는 단일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서브 플롯을 설명하고 있다. 즉, 주인공과 악역 사이에 핵심 플롯이 있다고 하기 보다는 주인공의 욕망에 따른 핵심 플롯과 악역 캐릭터가 스스로 갖는 욕망에 따른 서브 플롯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맹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최근 드라마를 보면 설득력을 갖는다. (당장 요즘 방영하는 '추적자'만 보더라도, 주인공 손현주의 플롯과 김상중의 플롯이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세세하게 예를 들어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덕에 이해가 쉬운 것은 좋은데, 시퀀스와 고전 구조의 변주에 이르면 그저 당위 차원에 머무르는 얘기들이 있어서 적용에 한계를 느낀다. 아마도 실제 작법은 저자 자신도 가장 말미에 밝히듯이 '극적 본능'을 몸에 익힐 때만이 성취가 가능하리라. 서문에 보니 심산 스쿨의 학생들이 공동으로 번역을 했다고 했는데, 뉘앙스와 맥락이 잘 파악되지 않는 것은 독자의 능력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번역에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