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한비자
그 많고 많은 중국의 사상가들 중에서 한비자를 챙겨보게 된 건 아주 사소한 계기 때문이다. 유니텔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러니 아마 90년대 중반쯤 되었을 게다. 그때 어느 채팅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누군가가 내게 한비자를 아냐고 물었다. 그때 내가 쓰고 있던 아이디가 hanvitz였는데 아이디를 보고 한비자 매니아인줄 알았단다. 그때 정확히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그 사람이 한비자를 거의 종교처럼 떠받들고 있었다는 정도의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한비자도 모르는 인생을 꽤 불쌍하게 여겼던 것도.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꼭 그때 일 때문만은 아니라고 해도 호기심에 잔뜩 불을 지른 건 사실이다.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한 데 굳이 지금 꺼내 읽게 된 건 드라마 추적자 때문일 게다. 16회 내내 권력과 지위의 뒤집기가 반복되는 걸 보면서 작가의 원천이 혹시 한비자가 아닐까 추측도 해봤다.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어서, 어떤 인터넷 기사를 보니 '추적자의 인물들이 봤음직한 도서' 목록에 한비자가 떡하니 올라가 있기도 했다. 암튼 과거, 현재의 잡다구리한 인연으로 보게 된 책이다.
고전을 읽는 일은 항상 얼마간 간극을 두게 된다. 엄연히 시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그 간극은 아주 자주 몰입과 이해를 방해한다. 이 책 - 한길 그레이트 북스 시리즈인 이 책도 그런 면은 여전하다. 이건 곁가지 이지만 왜 중국 고전들은 그렇게 옛 고어체 말투를 고집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교회를 생각해보면, 아주 보수일 것 같은 교회도 성경의 고어체를 버린지 꽤 됐다. 그러나 우리 고전만큼은 아직도 번역할 때도 낯선 고어체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언젠가 주역의 영어 번역서 제목이 Change인 것을 보고 깜놀했다. 어쩌면 영미권 애들이 중국 고전을 더 살갑게 이해하고 느끼고 있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950여 페이지나 되는 이 책도 실은 전혀 읽지 않은 한문과 우리 현대어로 풀이한 주석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예 한글 본문에서 현대 한글로 풀어쓴다면 정보 효용면에서 더 뛰어나지 않을까? 물론 한문 원문을 공부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책은 필요하겠지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입문자들, 교양서적으로 읽으려는 사람들에게까지 한자를 그것도 춘추전국시대에 쓰이던 고어를 보여줄 필요가 있을지... 진짜 의문이다.
그런 불평들을 제하고 본다면, 이 내용들은 파격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법가의 모습은 '오기의 예화' - 성 입구에 장애물을 놓고 치우면 상을 주겠다고 공표하고 실제 치우는 사람에게 상을 줘서 '법'을 알게 했다는 정도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렇게 융통성 없는 법이라는 시스템을 주장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전체 읽고난 느낌은 그 시스템을 절대 주장하고 있어도, 한비자의 핵심은 '인간'에 있었다. 그의 책은 법가 사상에 대한 설파라기 보다는 그가 바라보는 인간상에 대한 정리였다. 명분이나 가치보다 개인의 생존과 이익을 쫓게 마련이라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서 그는 모든 것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유가와 묵가에서 말하고 있는 인과 의, 성인, 군자들이 얼마나 허상인 것인지를, 보통 사람에게는 허황된 것일 수 밖에 없는지를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다.
물론 고전이 갖는 시대의 한계는 있다. 마치 은혜의 보편성을 설파한 마틴 루터가 노예제는 인정했듯이, 그 역시 지금의 우리 사회가 고민하는 자발성, 협력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 등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의 관점은 오로지 군주의 통치술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성 보편에 대한 그의 통찰은 여전히 오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유효한 척도를 제시하고 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은 아마도 또 다른 관점을 얻게 되기 때문인 듯 싶다. 이전에 역사 시간에 진나라의 분서갱유를 보면서 야만의 전형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유가와 묵가의 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해, 또 그들의 허황된 변설에 대해 한비가 염증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분서갱유야 말로 시의적절했던 통치술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도 든다. 모두 할 말은 있다는 거지.
동양의 한비를 읽고 좀 쉬고 서양의 마키아벨리로 가려고 한다. 그는 또 뭐에 그리 화가 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