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자료 조사차 국립중앙박물관엘 다녀왔다.
지금 쓰는 글에 필요한 자료는 각종 공예라 이곳 중앙박물관이 가지고 있는 보물, 국보는 조금 성격이 안맞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인 만큼 의무방어차원에 다녀왔다.
재작년 광주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팀이 여기 사무동에 있을 때 와보고는 거의 일년 반만에 찾은 셈이다.
그때 한창 진행중이던 공사는 이제 모두 끝이나고 한결 깔끔한 모습이다.
건물로 다가가는 진입로는 계단과 별도로 저렇게 대나무 경사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덕분에 노약자들과 대숲길을 걷고 싶은 사람들이 이 길로 즐겨 다녔다.
본관 아래, 진입로 옆에는 호수와 정자까지.
마침 견학 온 중학생들로 북적북적. 도슨트들이 설명하는 걸 들어보니 부산에서 온 학생들이란다.
기획전시관에서는 미국 미술 전시가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오늘은 상설 전시관 1층의 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그리고 3층의 공예전시실만 둘러봤다.
처음 볼 수 있는 건 뗀석기들. 돌을 깨서 만든 손도끼, 주먹돌 등이다.
저게 그냥 자연에서 깨진 돌인지 일부러 깬 건지, 같이 간 김피디와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래도 그걸 알아보는 감식안이나 노하우가 또 따로 있겠지.
돌을 깨서 만드는 도구와 장비들 - 주로 사냥용 도구와 농사에 쓰이는 도구들인데, 의외로 아주 섬세한 도구까지 돌로 만들어 쓰고 있었다.
위에 보이는 건 돌로만든 화살촉이다. 2센티 정도 될까?
위에는 역시 같은 크기의 다양한 화살촉들.
오늘 석기시대 유물 중에서 처음 본 것은 '홈날'이다.
그림이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데 (전시실이 어두워서 ISO를 1600으로 맞췄는데도 손떨림이 보일 정도다) 저 돌들은 아래 홈이 파여있어서 그 홈에 나무를 문지르면서 나무를 둥글고 날카롭게 가공하는 도구란다.
도구를 만드는 돌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흑요석'이다. 마치 타르가 굳은 것 같은 진한 흑색에 윤기가 흘러 가공해 놓은 도구들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게 보였다. 뿐만 아니라 아주 얇게 가공할 수 있는지 날카로운 칼날로 많이 만들어 쓰고 있었다.
위와 아래는 돌로 만든 낚시도구.
그물 추도 보이고.
위에 것들은 그물추인데 감은 실이 잘 풀리지 않도록 홈을 파놓았다.
작살 날들.
배의 일부분이란다. 통나무의 홈을 파서 만든 배다.
갈판과 갈돌. 이건 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큰 변화없이 사용된 도구이다.
석기시대의 간판스타 빗살무늬 토기들.
이거 보면서 가장 놀랐던 건. 생각보다 토기들이 상당히 컸다. 위 사진의 아래에 놓인 건 높이가 1미터 정도 된다.
뒤에 나오는 명도전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유물들의 사진에 공히 척도를 새겨 놓아야지 않을까 싶다.
이건 '뒤집개'라고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름이야 석기시대 사람들이 뭐로 불렀든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고.
흙을 갈아 엎는 용도로 썼다고 한다. 그러니 훗날 쟁기나 보습의 초기 형태인 셈이다.
이건 조금 일러스트가 아쉬운데, 팽이처럼 생긴 돌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에 실을 넣어서 이 돌을 돌리면서 실을 꼬았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떻게 했던 것인지 그림을 자세히 그려줬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손도끼. 도끼 간지가 제대로다.
이건 간석기의 대표선수. 돌칼.
한눈에 보기에도 실용성보다는 장식용이나 제의에 사용했을 것 같다. 돌로 된 칼날이 얇아서 실제로 뭔가를 베거나 충격을 입었을 때 쉽게 부러졌을 성 싶다. 설명에도 역시 그렇게 되어 있다.
딱 봐도 장식.
위의 사진은 아래 사진과 함께 찍은 건데, 돌로 만든 도끼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나무를 패는 용도로 쓰다가 톱의 기능도 아울러 갖추려다 보니 저렇게 진화를 한 모양인 것 같다.
별처럼 달처럼 생긴 도끼들... ^^
신석기 시대의 활과 화살촉들.
구석기에 비해서 좀 더 길어진 모양이다. 가공 기술의 차이겠거니.
이제 청동검의 등장이다.
칼날이 앞에서 보면 십자 드라이버 처럼 된 것은 아마도 청동의 경도가 낮아서 잘 부러지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무른 재질의 소재를 가공하는데 참고해도 좋을 듯 싶다.
역시 청동제 단검들.
거울과 단검.
위에 것은 청동검을 주조하는 거푸집이다.
이게 그 유명한 명도전이다.
전에 책에서 봤을 때는 이게 실제 칼만한 크기일 줄 알았는데 모두들 1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또 상당히 얇아서 실제 이걸 들고다니면서 거래도 가능했을 것 같다.
위에 것은 마구.
청계천에 놓였던 수표교의 복원품과 일제 강점기의 청계천 수표교 모습.
위의 것은 보습.
철기 시대에 드디어 금속제 농사도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인상 깊은 것은 이때 보습처럼 후기 조선 때까지 땅을 파는 도구들은 죄다 저렇게 나무에 쇠껍데기를 씌우는 형식이라는 것.
금동 향로. 유명하신 분이다.
신선계를 표현했다고 한다. 아마 신라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만불산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삼국의 문양 중에서 단연 백제의 문양이 정제되어 있고 세련미가 있다.
위는 백제의 벽돌들.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까지 전해진 유리잔.
이건 가야의 유물인데 집 모양 모형 토기들이 꽤 많았다.
그 집들 모양이 이렇게 아주 전형의 집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재밌는 것은 동남아의 수상가옥처럼 저렇게 기둥이 집을 받치고 있는 거다.
실제로 저런 집을 짓고 살았다는 건지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가야 무인의 복장.
사진이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데 갑옷은 미늘 갑옷으로 작은 철편을 가죽끈으로 엮어 입었고. 다리에도 미늘 갑옷으로 두르고 있다.
실제 저렇게 입었더라면 무게가 상당했을 듯. 칼을 잘 보면 손잡이에서 손이 벗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격'이 없다.
전쟁 중에 자기 칼에 부상도 꽤 많이 입었을 듯.
가야인의 투구. 철제 미늘 양식이다.
더 날카로워진 화살촉.
신라시대 유품들은 단연 금으로 만든 공예품들이 많았다.
함께 보던 어떤 아주머니는 연신 '이게 몇돈이야!'를 연발하시기도.
위 사진에는 없지만 다른 큰 귀걸이를 보면 우그러진 것이 보이는데, 아마도 얇에 만들어 타원형으로 가공한 듯 싶다.
그러면 그렇지 실제로 저 크기의 금을 달고 있다면 귀가 찢어질지도.
역시 사진이 어두운데 설명문처럼 마구들이 상당히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 마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이때 이미 등자가 보인다는 거. 삼국지의 유비는 기원 300년 경 이야기인데 어떻게 삼국지연의에는 등자가 없고 신라시대의 마구에는 등자가 있는 건지?
경천사지 10층석탑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