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2013. 4. 13. 01:01



아직도 모니터로 글을 보는 것이 썩 익숙하지 않다. 

적어도 내가 쓴 글을 수정하는 순간만큼은 종이에 출력해서 빨간줄도 긋고 메모도 해야 뭔가 일이 손에 잡히는데, 얼마 전부터 프린터에 용지가 자주 걸리기 시작했다. 갈갈이 뜯겨지 종이를 뽑아내고 프린터를 재부팅하면 꼬박 몇 분. 대여섯장에 한 번씩 종이가 걸리는데, 40여 페이지 한 회분량을 출력하려면 3, 40분이 족히 걸렸다. 이면지를 써서 그런가? 빳빳한 이면지를 골라 넣어보기도 하다가 앓느니 죽는다고 아예 출력을 포기하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프린터를 쓰지 않은지 한달 정도 됐을까? 오늘은 혹시나 하고 다시 출력을 걸어봤는데 역시나! 그래도 오늘은 꼭 해야만 하는 터라 한장씩 꽁무니를 붙들고, 프린터가 괴성을 질러대면 그 즉시 종이를 뽑아내는 식으로 출력을 했다. 그렇게 법석을 떨면서 출력을 마치고, 뽑아낸 종이 중에서 메모용도로 쓸 것이 없나 살피던 중에 파지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종이는 모두 상단 오른쪽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미스터리를 푸는 심정으로 추리를 이어나갔다. 내 프린터는 비정품 잉크통을 외부에 달고 호스로 헤드에 연결을 시켜놓았다. 헤드가 종이 왼쪽으로 갈 때 호스는 팽팽하게 당겨지지만 헤드가 오른쪽으로 갈때는 당겨진 잉크 호스가 둥그렇게 말린다. 특히 머릿글 처럼 종이 상단과 가까운 곳에선 그 호스에 종이가 걸릴수도 있을지 모른다. 


증명은 간단했다. 출력하는 한글 문서에서 머릿글을 지우고 출력하면 됐다. 결과는 대박이다. 머릿글을 지우니 어떤 종이를 집어넣어도 전혀 걸리지가 않았다. 못쓰게 됐던 프린터를 다시 쓰게 됐다는 것보다, 다른 프린터를 사려고 했던 돈이 굳어서 보다 더 뿌듯한 것은 뭔가 프린터와 소통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한시간여 동안 십여장을 억지로 뽑아내면서 손끝에 물리는 프린터 기어의 힘과 프린터의 단말마의 비명을 들으면서 몸으로 프린터와 소통을 한 것같은 기분이다. 


언젠가 동네 운동장을 뛰다 축구골대 그물에 걸려 넘어졌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그때 호되게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다 났지만, 그때도 오랜만에 내 몸에 전해져오는 통증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제대로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도 마찬가지. 진작 이런 수고를 겪었더라면! 수고가 결코 수고가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