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11
'성경'이 아니라 '성서'라 가르쳐 주신 목사님이 계셨다. '경'이 읊는 거라면 '서'는 읽고 해석하는 거라는 그 말씀이, 온통 본분과 당위만을 강요하는 이들 가운데에서 내게 숨통을 틔워주었다. 기형도의 '우리동네 목사님'이 부럽지 않았던 시절이다.
십수 년이 지난 뒤에 그 목사님의 소식을 들었다. 교인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 일로 교회를 그만둔 것도 사실이었고, 내게 보낸 마지막 메일에서 목사님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더라'라고 하셨다.
변절을 애도하지 않았다. 그분이 과거의 공을 들어 지금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굳이 지금의 상황으로 그분과의 추억을 재단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애써 이해하려고도 옹호하려고도 나는 당신편이라 하지 않았다. 일부러 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시간과 공간이 그만큼 아득했다. 어떤 발화도 새삼스러울 만큼.
종종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수정해야 할 것 같은 순간들과 맞닥뜨린다. 그건 안경알을 바꾼다기 보다는 착탄지점과 가늠쇠의 오차를 수정하기 위해 소총의 크리크를 돌리는 일과 같다. 세상과 내 시선의 불일치를 발견하는 순간, 단단한 꼬챙이를 들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후벼보고 싶은 충동에 싸인다. 하지만 결국은 깨닫고 만다. 가늠쇠 안의 좁은 구멍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은 너무 넓게 흐른다.
손석희의 종편행을 보면서 그 목사님이 떠올랐다. 다행이다. 386선배들이 흔히 얘기하듯 '걔가 학생운동 하던 때부터 알아봤어'하는 식의, 누군가의 전사를 꿰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고 누군가 개인이 진보의 가치를 담보한다거나, 그의 행보에 따라 가치가 휩쓸리지 않는다는 걸 안다는 것이, 그리고 나와 그의 거리가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임을 깨달을 만큼 아득하다는 것이. 무력한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나만의 숙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