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법칙이 있데. '본질은 필연성 없이 확장하지 않는다.'
나는 현대의 관객들이 서사를 대하는 방식이 이 '오컴의 면도날' 법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 '필연성'을 '개연성'으로 바꾸면 딱이지. 개연성 없이 이야기 늘이지 말아! <숨바꼭질>을 보고 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이 '개연성'이야. 개연성을 무시하면서 중요한 서사의 국면을 전환하고, 서사를 확장했다는 거지.
개연성이라. 나도 글을 쓰면서 수시로 내 이야기의 '개연성'을 살피게 되더라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 인생이 그렇질 않잖아? 계획대로 된 인생이 어디 있어? 다 우연이고 세렌티피티지. 그런데 왜 서사는 '우연'이 끼어들면 안 되는 거지?
이 고민에 대해 오르한 파묵이 아주 명쾌하게 설명을 하더라고.
현대 서사에서 개연성이란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한 장치라고. 서사란 캐릭터의 특이성과 보편성 사이의 줄다리기라고. (사실 뒤의 표현은 내가 한 거고 대략 그런 내용이야.)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것을 나의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보편성이 필요하다는 얘기야.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집착해야할, 고수해야할 개연성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지.
개연성에는 두 가지가 있을 거야. 생리, 물리적인 면의 개연성이 첫째지. 그러나 이건 영화마다 달리 세팅하고 들어가는 것 같아. <영웅본색>에서는 수십 발의 총알을 맞아도 안 죽어도, <스크럼>에서는 물에 젖어 트렁크에 놓인 시체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도 그러려니 하잖아.
그런데 정말 용서가 안 되는 개연성은 바로 '인간성'에 관한 것이지.
그건 때로는 상식에 준한 판단일 수도 있어. 가령 <숨바꼭질>에서 '왜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하는 외침들처럼 말이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캐릭터'에 관한 거지. 정확히는 '캐릭터의 일관성'이라고나 할까?
'왜 범인이 다른 시체를 처리하는 것과는 달리 손현주를 처리해서 결말이 달라지냐고?' 확실히 범인은 '일관성'을 잃고 손현주를 달리 처리하잖아? 그런데 나는 말야. 이게 별로 중요한 질문 같지가 않아. 앞서 '오컴의 면도날'로 다시 돌아가면 이 '필연성이 한참 모자라는' 장면이 확장한 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해.
오히려 본질, 즉 이영화의 주제는 그 앞 장면에서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었다고 보는 거지. 범인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니 그런 충격이 있었어. 내가 핼멧 속에 감춰져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몽타쥬가 산산히 부셔지는 충격 말야. 그건 마치 후드티를 뒤집어 쓴 흑인 소년 손에는 총이 들려 있을거라는 편견을 내 속에서 발견하는 것과도 같았단 말야.
<숨바꼭질>은 그 사회의 편견을 트릭으로 삼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 우리가 안온하고 평온하다고 생각하는 이 집이 공포의 장소라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 영화는 그 집에서 보호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그 집을 나왔을 때 어떤 얼굴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지.
그러면 그 뒤의 장면은 뭐냐고? 그건 상업 영화로서의 제스쳐라고 생각해. 영화를 보면서 줄곧 상상했어. 영화가 범인이 결국 손현주의 집을 차지하는 암울한 결말로 치달을까? 사실 그렇게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설정이잖아?
그리고 좀 있는 척을 하려면 그런 결말도 작가로서는 나쁘지 않고. 그럼에도 무리수를 둬가면서 다른 선택을 한 것은 그저 상업영화로서의 제스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아무튼 덕분에 '개연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있는 계기가 되었네.
쓰고 나서 '오컴의 면도날'을 검색해보니 관련 자료에 이런 말이 있더라.
"... 보편적 존재는 사고를 혼란케 하는 무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뭐 어렵게 얘기할 것도 없이 계피가 노래했잖아. 사랑이 희미해져가니 '보편적인 사랑, 보편적인 노래'가 되더라고. 우리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개연성'을 강조해야하겠어? 그러고 보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결말도 달리 이해가 되는데? 그 결말이야 말로 아무런 힘도 없는 서사의 보편성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시퀀스 분석>
1. 여자는 이웃집 남자가 자신의 방을 드나드는 것을 알고는 따지다가 살해당한다.
2. 결벽증에 걸린 손현주는 형의 소식을 듣고 형을 추억한다. 그는 입양되었다. 그의 형에 대한 강박이 되살아 난다.
3. 형이 살던 아파트는 수상하다. 형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이웃들은 형을 두려워 한다. 괴한에게 위협을 당하지만 문정희가 이를 구해준다. 문정희의 집에서 손님 대접을 받다가 형의 이야기가 나오자 문정희는 손현주를 쫓아낸다.
4.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헬맷이 이를 따라왔다. 손현주는 형의 유품에서 자신에 대한 형의 원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형이 집 주위를 배회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마침 헬맷이 아내를 공격하다가 이웃집의 도움으로 벗어난다.
5. 과거의 회상. 형을 시기한 손현주로 인해 형이 성폭행범으로 몰리게 된 일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의 강박과 공포는 더욱 심해진다.
6. 손현주는 핼멧을 잡기 위해 잠복한다. 결국 핼멧을 만난 손현주는 헬맷을 쫓아가고 거기서 그동안 자신들의 뒤를 미행하던 남자의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 남자의 사연 - 이웃집 여자의 실종을 알게된다.
7. 핼멧의 출현. 그리고 그 정체를 알게된다. 핼멧에 당하는 손현주.
8. 핼멧은 손현주의 집으로 향하고 손현주의 가족과 사투를 벌인다. 그리고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