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모든 것은 얇은 벽에서 시작한다. 고등학교 수학 선생인 이시가미는 어느날 옆집의 예사롭지 않은 소리를 듣게된다. 남자의 폭력과 모녀의 저항, 우발의 살인 그리고 공황의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시가미는 옆집 야스코 모녀의 집 문을 두드리고 그들을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어 낸다.
강변 공원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시신과의 연고를 쫓아 경찰들이 야스코를 방문하지만 야스코는 확실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는가 했는데 경시청의 자문을 맡고 있던 물리학자 유카와는 야스코의 옆집에 옛친구 이시가미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사건에 개입한다. 이어 한 천재 수학자가 만든 트릭을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천재 물리학자가 푸는 과정이 이어진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그러나 두 천재의 대결이 아니다. 사건의 윤곽을 파악한 유카와와 이시가미 단둘이 산행을 가지만 이것이 플롯상의 위기가 아니다. 실제 위기는 이들이 자리를 비운 야스코에게 벌어진다. 야스코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남자 쿠도에게 이시가미가 협박장을 보냈다. 야스코에게 접근하지 말 것.
야스코는 또 다른 사내의 집착과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느끼며 몸서리를 친다. 헌신과 집착, 사랑과 스토킹의 경계. 그 경계에 관객들을 이끌면서 이 플롯은 위기를 만든다. 산을 내려온 후 이시가미는 살인범으로 자수를 하고 야스코에게 보냈던 모든 스토킹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증거가 된다. 유카와와 이시가미의 대결이라는 한 축 그리고 헌신과 집착 사이의 갈등이라는 한 축은 여기서 각각 클라이막스에 오른다.
유카와는 이시가미의 모든 트릭을 밝혀내지만 사법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시가미의 승.
그가 희생을 통해 온전히 '헌신'을 이루는 순간, 교도소로 향하는 동안 그가 왜 야스코 모녀를 위해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회상이 나온다. 그가 생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순간 들려온 모녀의 음성,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그 음성이 이시가미의 생의 이유가 됐던 것이다. 이를 회상하면서 교도소로 향하는 그는 영화내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그때 모든 정황을 알게된 야스코가 이시가미에게 찾아와 함께 벌을 받겠다고 고백하면서 이시가미는 무너진다. 이시가미의 패.
두 천재가 수학과 물리학에서 꿈꾸던 아름다운 논리의 세상과는 달리 이 세상에서 나오는 방정식은 (유카와의 말처럼) aX^2+bX+C=사랑 과 같이 풀리지 않는다. 이시가미는 그 방정식을 풀지 못해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이고 사랑을 느끼며 구원을 받았다는 얘기다.
시리즈 물의 반복되는 인물들을 가지고 이런 감동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원작이 탁월하기 때문이겠지만 연출 또한 이에 못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