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에서
당분간은 우디 앨런과의 비교가 불가피할 것 같다.
우디 앨런 다음으로 홍상수의 영화를 보려고 한 것도 둘을 비교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우디 앨런이 뉴욕이라는 공간과 유럽의 공간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듯이 서사를 만드는 것처럼,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공간은 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모항을 배경으로 세 가지 이야기가 옴니버스로 이어진다. 세 이야기 모두 이자벨 위페르가 나오는데, 첫번째 이야기에선 한국 감독 친구 부부를 따라온 프랑스 여성으로,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남편 몰래 한국 남자와 바람을 피우러 놀러온 유부녀로, 세번째 이야기에서는 남편의 불륜으로 파경을 맞고 한국으로 여행을 온 여자로 나온다.
세 이야기에서 공통으로 전개되는 것은 해수욕장 안전요원인 유준상과의 만남이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유준상은 안느에게 즉흥노래를 만들어 들려주고 그녀의 호의를 얻는다. 두번째 이야기에서 유준상은 안느의 꿈속에서 욕망의 대상이 된다. 세번째 이야기에서는 실의에 빠져 자살을 하려던 안느가 유준상을 만나 웟 나잇 스탠드를 즐긴다. 쓰고보니 영화 전체를 관통하면서 어떤 맥락 있는 변화를 보이는 것은 유준상과의 만남 밖에는 없다.
일단은 매 옴니버스마다 안느를 욕망하는, 그러면서 질투하고, 몸을 사리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세번째 등장하는 도올은 그런 유형은 아니지만 대신 유준상이 그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윤여정이 '한국 남자들!' 하면서 치를 떨만도 하다. 하도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이 남자들의 이미지는, 그들의 지리멸렬한 행태 때문에 재미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유의미한 정서의 가치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아주 밋밋한 정조가 흐른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모든 정조가 이 땅을 이국으로 바라보는 이의 것이며, 유난히 그 정서가 나의 것으로 공감이 되지 않는다. 영화의 카메라는 안느를 주야장창 따라가지만 그가 풍경 노릇을 하는 탓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점들이 홍상수 영화를 안보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더 무엇이 있을까? 앞서 본 <우리 선희>처럼 그래도 끝까지 파 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