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의 기술 적정기술과의 만남
작년 연말 TV를 틀면 시끄러웠던 것 중 하나가 14년부터 디지털 방송이 되니 셋탑박스를 설치하라는 얘기였다. 우리 집이야 인터넷 TV라 해당사항이 없어서 그냥 지나갔지만, 그 광고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소비자들 중에 누가 디지털 방송을 해달라고 사정한 적이 있는지? 디지털 방송이 아니어서 불편을 겪은 사람이 있는지? 기술 발전을 추동하는 건 수요보다는 공급에 권한이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포드 회장의 말도 있다. '소비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더 빠른 말이었을 거라고' 일리 있는 얘기다. 혁신은 현재에 안주하는 시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 시선을 벗어나기 때문에 라이프 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진짜 '혁신'이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러나 근래의 문화를 보면 '혁신'을 빙자한 소비 조장이 너무나 흔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혁신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건 그저 제품의 사용 주기를 단축시킬 뿐 삶의 질을 개선하거나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한쪽에서는 더 빨리 더 많은 제품을 '혁신'이라고 소비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도 갖추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적정기술이 그러한 현대 문명과 문화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후자쪽,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총 여섯 챕터로 이뤄진 이 책은 적정기술은 무엇인지를, 적정기술의 다양한 접면을 들어 소개하고 있다. 서비스디자인, 비즈니스, 국제협력, 지속가능한 발전 등의 측면에서 적정기술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역지사지'인 듯 싶다. 공여자의 선한 의도만 부각되는 시혜가 아니라, 수혜자가 정말 필요하고, 정말 도움이 되고, 또 오래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실제 삶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기술이어야 한다는 거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관점에서, 상대방의 환경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비스 디자인은 그런 측면에서 거의 '적정기술'과 동격으로 소개되고, 국제원조의 태도와 접근방식에서 '적정기술'의 세계관을 접목해야 하고, 또 앞선 성공사례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재미 있었던 것은 전에 서비스 디자인의 사례를 조사할 때 봤던 성공 사례들 중 상당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놀면서 물을 풀 수 있게 만든다는 플레이 펌프는 설치한 곳에 애물단지가 되었고 어떤 곳에 보급한 인큐베이터와 난로들은 고철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역시 매스 미디어에서 호들갑을 떠는 사례들은 과연 그러한지 검증이 필요하다는 걸 여실히 느끼게 된다.
다양한 주제로 적정기술을 얘기한 것은 산만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사례를 통해 그 본질을 접근해야 하는 주제이긴 하지만 5장 국제개발협력과 6장 자원활동 부분은 소개되는 사례가 너무 개요수준의 것들이었고, 특히 6장의 경우에는, 단기 자원활동이 적정기술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얘기에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앞부분의 주제 만으로 심층있게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