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콩고 밀림에 살고 있는 피그미 족은 주변 종족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단다. 우간다와 콩고의 다른 민족들은 자원 쟁탈전을 벌이는 와중에 피그미족을 죽여 자신의 담력을 증명하거나 그들의 신체 일부로 부적을 삼는다고 한다. 이 책에 나온 이 이야기를 듣고, 이 책에서 나오는 다른 소재- 가령 '폐포 상피 경화증' 처럼 작가의 허구의 산물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불행하게도 피그미족 학살에 대한 얘기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같은 종족인 인간에게 저지르는 이러한 제노사이드는 비단 아프라카의 일만이 아님을, 저자는 실랄하게 지적한다.
이야기는 미국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의 회의실과 콩고의 밀림 그리고 일본의 어느 사설 연구실을 오간다. 이렇게 동떨어진 공간에 떨어진 인물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신인류의 출현이라는 기발한 소재가 놓여 있다. 신인류의 등장으로 인류의 대표 겪인 미국 대통령 번즈는 이 인류의 제노사이드를 계획하게 되고 여기에 신인류의 상상을 뛰어넘는 저항이 이어진다.
이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사라져야할 유일한 종족인 인간에 대한 질타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다뤄진 바 있다. <바이러스>라는 영화에서는 인간이야말로 숙주 지구를 죽이는 바이러스로 다뤘고, 키아누 리브스가 나오는 영화에서도 외계인은 지구의 영속을 위해 멸망을 지시한다. 지금 상영하는 <노아>도 그런 문제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인간의 죄성에 넌덜머리를 내는 것은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제노사이드>의 차별점은 그 인간의 대척점에 또 다른 인류를 설정해 놓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가와 더불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지금까지 다른 이야기들이 인간의 폭주에 대한 경고를 줄 수 있는 존재로 신이나 신에 버금가는 외계인의 존재로 설정했던 것과 달리 신인류를 등장시킨다. 신인류에 의해, 정확히는 신인류를 만들어낸 자연 선택에 의해 현생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은 약육강식을 폭력의 정당한 근거로 삼아온 인류의 뒤통수를 치는 설정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인간의 폭력성이야 말로 진화의 불완전성에 대한 증거라고 비아냥댄다.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신인류를 그리기 위해 작가는 암호학, 컴퓨터, 약학, 진화학, 밀리터리 분야 등 다양한 분야를 심도 있게 펼친다. 지금껏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 작품 중에서 이렇게 리서치가 풍부한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그 풍부한 정보와 자료들을 탄탄한 플롯으로 엮어내고 있고, 그 밑바탕에는 작가의 윤리관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 10만 명의 불치병 환자를 고치기 위한 신약 개발이 들어가고, 콩고에서는 세발바기 아기를 구하기 위한 희생이 이어지고, 미국에서는 제노사이드를 멈추게 하려는 고도의 두뇌싸움이 펼쳐진다. 각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들 사건들은 충분히 독자의 감정이 고양되고 몰입할만한 윤리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책의 뒤편에는 저자가 참고한 참고서적이 깨알같은 글씨로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다. 참고서적이 적혀 있는 소설이라. 색다른 감흥을 느끼게 한다. 오랜만에 밤을 세워 읽게 만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