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19장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마 16:4)
앞에도 나왔던 말씀. 앞 장에 나온 '완악함'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리라. 도무지 믿지 못하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겠지. 거기에 나도 포함이 되는 것인가? 그러나 무엇을 믿는가의 문제로 들어가면 여전히 쉬운 문제는 아니다. 요즘 <노아>라는 영화를 두고서도 기독교 일각에서 벌어지는 논쟁들, 아니 비난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에겐, 성경의 자구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상상하듯이 인류 학살의 스위치를 만들고 있는 노아에게 고뇌와 의심이 왜 없겠나? 나는 오히려 그런 노아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기독교인을 보면, 그들이야 말로 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학살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다. 믿음은 결국 자신이 바라는 것들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우리는 신에 대해서 더 많은 상상을 해야 한다. 그게 믿음이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 16:20)
이것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다. 그러나 전래의 해석, 오류가 없는 예수라는 선입견을 버리면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다. 이 앞에 바리새인과의 논쟁,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 일들과 신변의 위협 등이 예수의 이런 반응을 만든 것은 아닐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 17:5)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음성을 듣길 원한다. 그러나 확성기로 틀지 않는이상 모든 이들이 똑같은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내가 들은 음성이 과연 성령의 음성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래서 광기와 광신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체험을 이야기한다. 당장 외삼촌만 해도 숙모에 대한 정죄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엊그제 어머니는 꿈결에 잠언 16장에서 18장을 읽으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어릴 적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계시는 길몽에 대한 관습처럼 혼자 간직하는 것이 옳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종종 성경 말씀은 상당한 동기를 부여하지만 또 스스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기도 한다. 어떤 좌절에 대해서는 신은 항상 인간의 부족을 탓하게 마련이다. 그때의 신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신이다. 이런 말씀에 기반한.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뭘까? 언뜻 들으면 마치 염력이라도 얘기하는 것 같다. 신과의 관계에서 믿음을 다루지 않고 '믿음'을 별개의 대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오독의 여지가 크다. 그리고 믿음에 정량 가능한 성질을 부여한다는 면에서도 탐탁지 않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다. 모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임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도 많이 인용했던. 그러나 혼자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날 수는 없는 거냐는 물음에는 할 말이 없어지는 말씀이기도 하다.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그저 위로와 권면의 수사나 관용어가 아닌지.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 19:12,13)
사도 바울을 서신에서만 이 구절이 있는줄 알았더니 예수의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있었네.
"...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마19:17)
성경을 읽다보면 이처럼 쉬운 듯하면서도 생각해보면 언뜻 논리에 맞지 않는 얘기들이 꽤 많다. 동문서답이랄까? 이 대답 앞에 청년의 질문은 '선한 일을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는데 예수는 '선한 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얘기한다. 오직 '선한 이'만이 '선'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다는 말씀인 건가? 또 예수는 스스로를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예수 자신과 하나님을 별개의 주체로 생각을 하는 건가? 그래서 '차이'가 있는 존재라는 건가?
어찌보면 지금 이런 질문들은 예수 사후 종교가들이 만든 신학의 틀에서 만든 교리에 근거한 질문일지 모른다. 본말이, 주객이 전도된 질문이겠다. 예수는 그저 '인간이 선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려줄 대로 알려줬다'는 것을 강조하시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