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 제국의 부활
그리스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또 몇 개 기사나 블로그 글을 봐서는 역사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라고 한다. 허나 '사극'이란 말이 원래 이율배반의 언어이고 보면 역사를 떠나 그 자체를 하나의 서사로 봐도 무방하겠다. 여전히 해결이 안되는 논쟁거리이긴 하지만.
요즘 드라마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드라마가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어떤 작품을 재밌게 몰입해서 - 나 같은 경우엔 다른 웹 페이지를 들락날락 거리지 않으면서 보게 하는 요소는 뭘까? '긴장'이란 단어는 의외로 상당히 모호하다. 오히려 그 이면에 수용자들이 갖게 되는 감정을 드러내는 단어가 좋겠다. 가령 '두려움'이랄까? 그러나 많은 작품들이, 특히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수의 드라마들이 이 '두려움'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보다는 다른 감정이다. 그걸 찾아내는 것이 결국 작품 분석의 완성이겠는데, 하여튼 요즘은 그게 '딜레마'가 아닐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두 개의 타당한 선택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선택지 사이에서 인물의 선택이 다시 인물에 대한 수용자들의 이해를 깊게하고 그의 갈등을 드러내며 거기에 공감하게 한다.. 대략 요즘 정리되고 있는 내용인데, 이런 영화를 보면 또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딜레마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어떤 '목적' - 이 영화에서는 그리스의 신념인 '자유'를 지킨다는 목적이 있고, 그 신념을 페르시아 군대와 아르테미시아가 위협한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공의 내면에서 어떤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아... 쓰다보니 그런 생각도 든다. 이제껏 우리는 '갈등'이란 말을 너무 모호하게 써 왔구나! 주인공 내면의 갈등과 주인공과 악역과의 대립을 구분 없이 갈등이라고 써 온 것이 아닌가? 수용자들이 가장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상황은 주인공과 악역의 갈등이 아니라 주인공 내면의 갈등일 텐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내면의 갈등은 없다. 물론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과 지고지순한 신념과의 갈등은 있겠지만 관객은 그런 수준에서 갈등하는 영웅을 바라지는 않는다.
당연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나간다. 그리고 적군과 엎치락 뒤치락 하는 승부를 전개한 끝에 결국 승리를 쟁취한다. 총 네 번의 전투. 그리고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전투 하나. 다섯번의 전투가 벌어진다. 그동안 내면의 갈등이 빈 자리를,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한 액션들로 채운다. 갈등이 없어도 시종일관 심장이 벌렁벌렁하는 흥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증명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작의 아우라를 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전작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스파르타 300명의 규모의 차이에서 오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느낌이 상당이 희석되고, 그 와중에 페르시아 왕의 회유책과 여기에 대응하는 스파르타 인들의 기백이 만드는 스타일 등이 충분히 섹시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런 느낌은 상당히 퇴색되었다.
에바 그린이 연기한 아르테미시아도 전반부 그의 과거가 오히려 뒷부분보다 더 설득력있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아르테미시아와 그리스 장군과의 로맨스를 강화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무래도 그건 어려운 선택이었을 게다. 그래서 지금 들어간, 에바 그린이 적장을 유혹하는 장면도 썩 잘 녹아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