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
엊그제 지인이 책을 보내줬다.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탓에 책을 버리려다가 내게 보냈다. 그 중에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있었다.
그게 발단이다. 전에 연구소에 다닐 때 스피노자부터 그래마스 등 기호학 이쪽 저쪽을 공부하던 생각이 나서 다시 개론서인 이책을 집어들었다. 그 사이 생각이 좀 여물었는지 이전에는 이해가지 않던 것이 조금씩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특히 서사 의미의 측면에서 기호학을 대입할 때 쉽게 이해되는 것이 많다.
소쉬르가 기표와 기의를 자의적 관계라고 규정한 것과 달리 퍼스가 도상, 지표, 상징으로 그 층위를 넓힌 것도 맥락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소쉬르의 '자의적 관계'에 가장 먼저 반증하는 사례가 '도상'이다. 유사성을 근거로 하는 도상은 기표와 기의가 동기부여된, 필연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또 지표는 적극적인 '의미 작용'을 상정해야함을 알게 한다.
궁극의 실체에 가닿기 위해 무한한 '의미 작용'을 반복한다는 것은 문학이나 영화를 해석하는 여러 양상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특히 habit(타성)으로 해석을 한다는 얘기는 관습의 덩어리인 '장르'에 근거에 작품을 예측하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캉의 기표와 미끄러지는 기의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의 실마리를 얻었다. 이후 에코의 <기호학 이론>을 읽은 다음에는 다시 라캉으로 가봐야겠다. 요즘 카이스트에서 의뢰를 받아 시나리오 저작 지원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인물과 서사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욕망과 욕구, 요구를 구분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지금 대략의 구상은 감춰진 욕망이 결국 인물에게 딜레마의 상황에 처하게 한다는 설을 준비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 신화소 연구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화여대의 연구진들이 만든 시나리오 저작툴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저작툴의 한계도 예측하게 된다. 소쉬르가 말한 의미의 생성 원리인 '차이'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 결국 통시적 관계망 속에서 맺어지는 (데리다가 얘기한) '차연'의 성격을 구현하지 않으면 의미를 생성하지 못하게 된다.
최종 해석체에 다다르기 위해 공동체가 의미 작용을 반복한다는 얘기에서는 최근에 취재를 했던 '스페이스 오뉴월'의 워크숍 '리얼 다이얼로그'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현장과 책의 내용이 만난다는 것도 신선한 발견이다.
아직도 드문드문 이해가 안 가는 것이 꽤 많은데 앞으로도 쭉 살펴봐야겠다. 이 책의 장점은 그런 지도를 그려줄 수 있다는 점. 제일 책 뒤에 더 읽을 거리를 제시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이다. 다만 원서들 위주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