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요즘 읽고 있는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글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현존재에 대해서 폴 리쾨르는 사물들 가운데로 던져진 운명이라고 요약한다. 자연히 최근에 읽은 소설 <사물들>과 겹친다. 하이데거의 사물들이 세계를 가리키는 것처럼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역시 존재를 규정하는 세계를 묘사한다.
이 사물들엔 철저하게 주인공의 욕망이 투사된다. 주인공인 두 연인은 갖가지 '사물들'을 보고 바라고 이야기하고 결국은 (대체제라도) 소유하면서 살아간다. 욕망과 소유의 쳇바퀴, 그것이 이들의 삶이다. 욕망과 소유의 무한 궤도는 한치의 타협도 없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그럴듯한 삶을 바랐던 이들은 그 대체제로 튀니지를 선택한다. 그러나 바닷물이 다른 갈증만 유발했던 것처럼 이들은 여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오래전에 도무지 무서운 게 없던 때는 소설이나 시나리오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시나리오가 행동을 서술하면서 플롯을 구성하는데 집중한다면 소설은 묘사로 다른 차별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묘사는 서술보다 까다로와서 조악한 문장, 빈한한 단어를 견디지 못한다.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은 새삼 소설의 '묘사'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까지 파고들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제품설명서처럼 그는 주인공들이 열망한 부유층의 삶과 그 삶을 표상하는 사물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또 한 가지, 이 소설은 새로운 형식 실험을 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미래형으로 서술된다는 점. 대부분의 서사가 욕망을 다루고 있음에도 왜 항상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거야? 라고 되묻는 것 같다. 고다르의 영화처럼 자신의 통찰을 형식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이전같으면 꼴보기 싫었을 텐데 왠지 신선하다. 나이를 먹고 있다는 증거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