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사도가 영조를 죽이기 위해 칼을 뽑아든 순간, 사도는 어린 세손(훗날 정조)이 영조에게 하는 얘기를 듣는다.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유롭게 하늘로 솟구치는 화살을 보면서 ‘얼마나 떳떳한가’라며 부러워하던 사도는 이 얘기를 듣고 칼을 내려놓는다.
연초에 시나리오를 보고 실망했던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서 과연 시나리오와 영화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확인해 봤다. 사도가 영조를 죽이려고 칼을 빼어드는 클라이막스가 도입부에 올라오면서 좀 더 친절한 영화가 됐고, 사도와 영조의 죽음 이후, 정조의 행보(그러니까 복수의 정서를 깔고 있는)는 크게 줄어들어 영조와 사도의 감정에 더욱 몰입을 하게 됐다. 뒤주와 사도의 퇴행을 상징하는 무덤굴의 이미지를 일치시키면서 복선을 구축하는 미술도 시나리오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고.
그러나 내가 시나리오를 보면서 놓친 것은 이 영화의 핵심 갈등이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이 기존의 사도세자 이야기와 차별된 지점은 사도세자의 비운을 체제의 권력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이게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영화는 영조와 사도의 갈등을 왕과 세자 이전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혹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바라본다. 이 두 인간을 나누는 것은 흔히들 사도세자의 비운을 설명할 때 동원하는 미래 권력과 현재 권력이 아니라 어린 정조의 말처럼 ‘예법’과 ‘사람’으로 함축된다.
결국 왕이 될 거 잠시 하는 척, 할 수는 없겠느냐는 신하들의 말에 사도는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영조의 삶은 아들을 죽일 수도 있는 삶이다. 사도 살해는 그 잠재태가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영조는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했지만 이건 역설이다. 영조가 그런 삶을 선택했기에 초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정조의 얘기를 듣고 칼을 버린 것은 끝까지 ‘그렇게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영화를 보지 않고 시나리오만 다시 봤더라면 아마 감흥은 처음이랑 비슷했을 거다. 사도라는 인물, 영조라는 인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 탓이다. 특히 유아인은 (거짓말 약간 보태) 프레임 단위로 세세한 감정을 구축해 나간다. 영조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스트레스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