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다시 읽는 성경

창세기 27~29장

자카르타 2016. 5. 6. 11:29

27장. 

'야곱이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다. 적어도 이런 장면을 보면. 리브가는 확실히 자신을 닮은 야곱을 더 사랑했던 것이 틀림 없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부모에게도 이런 편애가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우리 집도 그랬었던 것 같고, 아는 이들을 봐도 그렇다. 기원이 발화된 음성에 구속되는 것도 의문이다. 분명 이삭은 머릿속에서 에서를 상상하면서 에서를 축복했을 텐데, 그저 '너'라고 부른 대상이 야곱이었다고 해서 그 축복이 야곱에게 적용될 수 있나? 이건 마치 이삭의 축복의 발화가 마치 주문처럼 사용된다는 얘기가 아닌지? 그리고 축복은 총량제인가? 그리고 배타적인가? 이건 학생 인권이 교사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발상처럼 들린다. 야곱에게 준 복이 왜 에서의 복을 제한하는지? 애초에 그런 것이었다면 이삭은 야곱의 복을 침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고 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역시 당대의 한계를 가진 생각이다. 그 동안 교회에서는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사모했었던 반면 에서는 소홀히 여겼다며 이런 상황을 설명하려 했는데 27장 후반을 보면 복을 빼앗기고 서러워하고 앙심을 품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 에서가 번창한 것을 보면 에서에게 한 저주가 그다지 유효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야곱을 빼돌리는 리브가는 죽을 때 얼마나 야곱이 보고 싶었을까? 리브가의 부고가 라반에게 가지 않은 걸로 봐서는 에서가 이를 막았을 수도 있겠다. 


28장. 

'야곱이 십일조를 약속하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후, 여기서 다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오로지 신에게 한 약속이라는 점에서 앞선 사례와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여기서 재밌는 것은 야곱이 신의 축복을 십일조의 조건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자신이 돌아올 수 있다면 신에게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야곱의 캐릭터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29장. 

'사랑받지 못한 레아의 고군분투기' 

야곱이 라반의 딸들과 결혼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라반이 야곱의 뒤통수를 친다. 뒤에 야곱의 복수는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후반절 레아가 네 번 출산을 하며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면, 첫째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눈에 띄고, 둘째 레아가 얼마나 외로운 생활을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