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사이코패스라는 용어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 여전하다. 마치 노인들의 질병을 싸잡아 '노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성의 없어 보일 뿐 아니라, '낙석 주의' 경고판처럼 애매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최근에 나온 책을 보면 사이코패스의 뇌구조의 특성을 분석하면서 일반인도 특정한 뇌 부위를 자극해 활성화시키면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유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원하는 바,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억누를 수 있는, 까놓고 얘기해서 치유할 수 있는 방식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결국 지금의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는 커다란 블랙홀이 되어 대안을 모색하는 시도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그래서 <덱스터>의 가치가 빛난다. 텍스터는 피해자에 공감하고, 이성과 자식에게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죄과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다. 사이코패스의 정의 -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과 이율배반의 성향들을 가진 덱스터는 그 존재 자체로 긴장과 갈등을 유발한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따지면 덱스터는 유아기 때 엄청난 사건을 목격한 트라우마로 인해 사이코패스 성향이 발현되었을 뿐이다. 시즌 1의 끝부분에서 덱스터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시청자들은 비로서 덱스터라는 인간을 이해하게(적어도 이해했다고 믿게) 된다. <덱스터>는 연쇄살인마까지도 서사를 통해, 그 심연을 엿보고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면에서 큰 성취를 이룬다. 그리고 사이코패스 문제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이야기 한다.
반면 정유정의 <종의 기원>은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상위 1%의 포식자를 다루면서 이러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자신의 아들이 가족조차도 무참히 죽일 수 있는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16년 동안 이 성향을 다스리기 위해 엄격한 훈육과 부작용이 심각한 약물 치료를 진행한다. 그러나 결국 아들 안에 숨죽이고 있던 포식자가 우리를 부수고 탈출한 날 포식자는 그동안 굶주린 피를 마음껏 음미한다. 이 소설은 스스로도 자신이 포식자인줄 몰랐던 남자가 이틀 사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과정 - 즉 포식의 과정들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더구나 포식자의 관점에서 혈연과 우정을 초월하는 포식자의 생의 의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독자로서 그 의지가 이해되고 동화되는 것이 신기할 만큼.
정유정 작가가 사이코패스에 천착하게 만든 계기는 94년 박한상 사건이라고 한다. 나 역시 기억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탕자는 회개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를 수십 차례 칼로 찔러 죽였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다. 작가는 도무지 범인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았고, 그 심리를 이해하려는 과정이 지금 여기에 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한 주제를 파고든 작가의 노력은 정말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룬 성과도 대단하지만, 작가의 얘기를 듣고 나니 더욱 아쉬워 지는 대목도 있다. 정말 성의 없는 단어 '패륜'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그저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가져와 맞바꾼 셈이다. <종의 기원>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사이코패스는 진화의 과정임을 주장한다. 그 단언과 함께 작가가 세필화로 그린 사이코패스는 이해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는 포식자일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라는 질문은 다시 <덱스터> 이전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