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너의 이름은

자카르타 2017. 1. 31. 00:35



오래 전 함께 시 수업을 듣는 학생 하나가 쓴 시구가 잊히질 않는다. ‘덧니 같은 스무 살.’ 시를 쓰는 재주는 고사하고 시에 대한 감별력도 없지만, 그 시구만은 참 대단해 보였다. 덧니와 스무살. 따지고 보면 딱히 인과관계가 없는 그 둘 사이의 먼 간극에는 스무살을 떠올리게 하는 많은 이미지들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그 이후 ‘시적’이라고 하면 그 시구가 우선 떠오른다. <타나토노스>의 죽음 탐험가들의 투명한 생명선처럼, 연관 없는 단어들을 잇기 위해 상상력의 촉수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 그게 ‘시적’이라고, 나름 정리하고 있다.

종종 영화에서도 이런 ‘시적’인 순간들을 발견한다. 가령… 울면서 깨어난 십대의 어느 아침과 재난으로 인한 상실을 연결한 것이 그렇고,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무수한 망각의 공백과 헛헛한 도시의 삶을 연결한 것도 그렇다. 신을 관계의 확장이라고 얘기하는 할머니 대사는 고스란히 이 영화 <너의 이름은>의 시적 상상력의 스케일을 담고 있다.

관계의 끈이 끊임없이 이어진 끝에 만나는 신이라니. 우리는 왜 이런 신이 없는가, 부럽기도 했다. 신이 없겠나? 신을 그렇게 볼 눈이 없는 거겠지. 그런 눈을 가진 작가가 경이롭다. 작가는 거미와 같다. 거미는 밤새 실을 자아내 먼 처마와 기둥 사이를 연결한다.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이 길게 누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것도 잠시 첫 행인의 몸에 걸려 끊어지고 만다. 그러나 거미는 고집스레 다시 거미줄을 뿜는다. 작품이 품은 상상력과 현실의 효용도 그와 같다. 예술이 이어놓은 상상력이 날 선 현실에 뚝뚝 끊어지길 거듭해도 또 잇고 잇는 것이 예술의 임무가 아닐까? 임무가 너무 부담스럽다면 기능이랄지. 효용이랄지.

예술의 상상력은 현실의 공감력이다. 후쿠시마의 재난이나 세월호 재난에 대해서 작가가 공감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상력도 피어나기 어려웠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