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솔로몬의 위증

자카르타 2017. 4. 1. 22:11




세월호에 대한 막발, 특히 비용 운운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떠오른다.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장병들이 희생해야 하는 근거는 뭘까? 영화 속 인물들 저마다 각각의 정의감, 동정심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군 그리고 사회는 명확한 속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 미션을 성취해 냈을 때 사회가 얻는 실익이 훨씬 크다는 속셈, 셈속. 그건 아마도 국가와 국민 간의 어떤 신뢰를 잃느냐 얻느냐에 따르는 손익일 테다. 


스웨덴의 복지, 프랑스의 관용도 그런 셈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선이나 도덕의 차이가 아니라 단지 손익계산서의 항목의 차이라는 것. 우리가 ‘개인의 불운’ ‘개인의 비용’이라고 전가하면서 명세서에서 빼놓은 것들이,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잊혀지기는커녕 결국은 공동체의 비용으로 청구서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던 거고, 그래서 이자가 붙기 전에 미리 공동체의 청구서에 항목을 넣어둔 것이라고. 이런 생각이라야 설득이 가능하다. 이런 생각이라면 문제는 보이지 않는, 혹은 유예된 카드 청구서를 찾아내는 일이 될 테니까. 다분히 판타지 스러운 <솔로몬의 위증>의 아이들처럼. 

한 아이가 죽었다. 경찰과 어른들은 자살이라고 하고, 아이들은 일진 아이를 의심한다. 의심이 의심을 낳으며 증폭되는 사이,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에 아이들은 이대로 덮을 수는 없다며 스스로 재판정을 꾸리고 사건의 실체를 밝힌다는 내용이다. 
시간이 지나 잊혀지기를 바라는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현명하다. 그냥 묻는다면 더 큰 희생을 치룰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1부 사건, 2부 재판으로 구성된 영화는, 2부를 온전히 재판과정에 할애한다. 재판을 반대한 어른들이 보기에 그 결과가 그리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5일 간의 재판을 통해 아이들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다. 십여 년이 지나 모교로 돌아온 주인공에게 교장은 묻는다. 그 재판을 했던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나 같은 속물들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게다. 판사를 맡았던 녀석은 그때 일로 법조계로 나갔고, 변호사를 맡았던 누구는... 그러나 주인공은 웃으며 얘기한다. ‘모두 친구가 되었죠.’ 

성찰이라는 거 통찰이라는 거 별거 아닌 거 같다. 우리의 명세서에 들어있지 않은 항목들을 찾아내는 거. 보이지 않는 인과관계의 가늘고 투명한 실들을 찾아내는 거. 그런 거 할 줄 아는 사람들, 어른들이 필요하다. 없다면 지금 아이들이라도 그런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우리처럼 미련하게 살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