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자카르타 2018. 8. 12. 23:35



아마 재작년 여름일 거다. 정유정 작가의 책에 빠져 지낸 것이. 그때 사이코 패스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종의 기원>을 알게됐고, 이후 작가의 책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래봐야 <7년의 밤> <28>까지. 아직 초기작 두 권은 보질 못했다. 


작가의 작업론을 읽고 나면 늘 헛헛하다. 책으로 복싱을 배운 것 같다. 집필의 링 위에 올랐을 때 시간은 얼마나 더디게 흐르는지, 비로소 완고를 내려놓을 수 있는 내면의 경종은 언제 울려야 하는지, 초고가 편집자나 제작자로부터 난도질을 당했을 때의 비참함은 어떻게 견디는지. 자신이 글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책의 글로서는 알 수가 없다. 역시 그건 그냥 작가가 겪고 견뎌야 하는 것. 


자신의 책에선 그토록 자기만의 묘사가 출중한 작가가 집필론에선 로버트 맥기의 얘기만 반복하는 것도 이상하다. 이를테면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썼듯이 퇴짜맞은 초고를 꽂아놓은 대못처럼, 신산한 초보작가의 고통을 그려주는 이미지가 없는 점이 이상하다. 아마도 <종의 기원>을 읽고 든 생각처럼 작가는 진짜 사이코패스이거나 천재(혹은 이 분야 수재)가 아닐까. 워낙에 술술 써져서 달리 고통을 증빙할 증거가 없는 게 아닐지. 


역시 맥기 영감이 스토리 분야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걸 새삼 느낀게 소득 하나. 그리고 집필엔 왕도랄 게 없다는 뻔한 사실을 확인한 게 또 하나 소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