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규칙
플롯을 구성하고 캐릭터를 만들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장르 안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내가 쓴 것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건 좌절보다는 불안하게 만든다. '새로운 것'은 그야말로 전혀 다른 가치다. 그 자체로는 작품의 완성도와도 별개인. 그러나 내 족적이 장르 안에서 헤매고 있다는 얘기는 그만큼 내가 가진 밑천들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히가시노 게이코 같은 스타 작가도 그런 불안을 가지고 있는 걸까? 우스개로 풀기는 했지만 매번 중요한 전환점에서 드러나는 극중 인물들의 '방백'들은 히가시노 게이코가 그동안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회의에 찬 질문'들처럼 들린다. '밀실살인은 도대체 누굴 위한 거냐'라는 질문부터 - 이 질문은 그야말로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깨는 질문이었다. 정말 도대체 어떤 살인자가 밀실을 꾸미는데 공력을 들인단 말인가? - 살인 무기 트릭, 알리바이 트릭 등 미스터리 소설에서 장르로 굳어진 유형들의 관습들을 조롱하고 있다. 그 조롱은 아마도 이제껏 탐정소설을 만들어온 작가들이나 그 독자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새로운, 진부하지 않은 작품을 쓰고자 히가시노 게이코 자신에게 향한 질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글에 나오는 '진부한 형사'와 '전형의 명탐정'이 벌이는 대사들도 작가의 육성처럼 들린다.
아쉬운 것은 장르의 전형에 대한 회의가, 탐정 소설의 틀을 갖춘 이 책에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가시노 게이코처럼 언어로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 그 어느 때보다 장르에 정통한 요즘 관객들에게는 '맞아, 맞아'하고 맞장구를 치는 수다에 그치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런 대안이야 히가시노 게이코가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면야 이 책의 효능은 그것으로 족할 듯 싶다. 적어도 미스터리를 쓰려는 초보 작가들에게는, 그리고 미스터리의 배치(정보의 지연)과 플로팅을 혼돈하는 준초보 작가들에게는 피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밑줄 그어 보여주는 지침서가 될 수도 있을 게다. 간만에 편하게 낄낄대며 읽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