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20130921

자카르타 2013. 9. 22. 00:31



오래 전에 MBC 방송에서 <베스트 극장>이란 걸 매주 한 적이 있다. 

뒤에 가서는 창작 단막극이 주로 방송이 됐지만 초기에는 단편 소설들이 각색되어서 나오기도 했다. 

박완서의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이라는 단편도 소설책이 아니라 <베스트 극장>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밖에도 몇 편이 기억에 남는데, 그 중에 제목은 기억 나지 않고 어떤 장면만 기억 남는 것도 있다. 


어느 시골에 사는 할머니 얘기였는데 그 할머니가 가족에게도 버림 받고 오로지 의지하고 있는 게 마당의 화초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 화초 때문에 말썽이 생겨서 할머니가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알고보니 화초 중에 대마초가 있었던 것이다. 

정상참작이 되서 대마를 다 뽑아낸다는 조건으로 할머니는 풀려나오는데,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가 하는 독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중에 서울 아들네 갔을 때 아파트 제일 꼭대기의 크레인이 마치 두 팔을 벌린 세종대왕 같더라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왜 유독 그 얘기만 기억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상상력에 동의가 안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살던 동네 산 중턱에는 워커힐 아파트가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좋다는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도 그 크레인이 있었고, 한동안 그 크레인이 뭐하는 건지 도무지 몰랐다. 그저 느낌으로 뭔가 위압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워낙 부자 단지였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뭔가 아랫동네 아이들이 올라오는지 망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언제부턴지 모르게 그 크레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아파트만이 아니라 전국의 아파트들를 뒤져봐도 그런 크레인이 있는 곳은 아마 이제는 한 곳도 없을 게다. 왜 없어졌을까? 이제 고급 아파트에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거나 그 외의 아파트에서는 고층 사다리차를 이용한다. 사다리차를 부르는 값도 만만치 않은데 왜 아파트 주민들이 공짜로 쓸 수 있는 크레인이 사라진 걸까? 우선은 관리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사를 하지 않는 동안 붙박이 크레인은 낡고 녹슬고 있을 테니까. 결국 안전에도 큰 문제가 되겠고. 


이건 내 상상이지만 저층의 민원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붙박이 크레인의 특징은 벽에 딱 붙어 이삿짐들이 올라간다. 올라가는 내내 저층에 있는 사람들은 창문에 바짝 붙어서 이삿짐을 싣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봐야하는데 그게 상당히 불편하고 불쾌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사다리차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짐을 싣고 마치 점을 찍듯이 가고자 하는 층에 짐을 옮기는 방식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았을까? 저층일수록 그 크레인데 대한 증오가 쌓이지 않았을까? 그 증오가 민원으로 쌓이고 결국에는 그 크레인을 밀어내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 본다.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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