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다시 읽는 성경

마태복음 8~12장

자카르타 2014. 3. 20. 22:30

 이후로 본격 이어지는 예수의 공생애는 주로 사람을 치료하는 사역으로 채워졌다. 치유를 겸한 치료. 

오실 이가 예수인지를 묻는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이 사역에 근거한다. 

그와 함께 제시되는 메시지는 제사의 허위에 대한 지적이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9장)' '곡을 하여도 울지 않고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 (10장)'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12장)'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이다.' 

성직자들이 생업이 없음에 대한 근거로 쓸 것 같은데 최저임금이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스라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10장 23절) 

성경을 자구 대로 해석을 해서는 성경의 오류만 증폭시키게 된다. 역사에 종말이 있다는 정도로 이 은유를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여라.' (10장 36절) 

이것 역시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11장 10절. 예수 역시 과거 성경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인용에 있어. 나쁘게 얘기하면 오용, 좋게 말하면 융통성 있는 활용을 하고 있다.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말라기 3장 1절의 원문과는 인칭이 다르고 '네' 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유일신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 분화하면서 변화가 필요했었던 듯.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장 12절)

뒷구절은 알고 있었는데 앞구절은 뜻밖이다. 왜 하필 '세례 요한의 때부터'라는 단서가 필요했을까? 이때가 의미하는 건 뭘까? 마치 뉘앙스로만 보면 이때부터 천국 쟁탈 무한 경쟁 시대로 돌입한다고 선포하는 것 같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는 나무를 보아 아느니라." (12장 33절) 

요즘 종북 몰이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사회주의 정책이 치유할 수 있다면 그건 그 부분에 있어서는 사회주의가 옳다는 얘기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12장 39절)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음란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진보한 정의를 예수가 쓰고 있다. 모든 은유를 걷어내고 그 실체를 확인하고 소유하려는 욕구. 그 욕구를 음란이라고 불렀다. 마치 과일의 과육을 모두 걷어내고 씨앗에 집중하는 유전자의 이기심 같은 걸 질타한 걸까? 당대의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먹이는 것은 과일의 과육이라는 의미에서, 은유와 상상력과 신뢰의 회복이 이 사회를 지탱한다고 볼 수 있을까? < 이건 오독이다. 오히려 본질에 들어가지 못하고 피상에 머무르는 것을 비판한다고 봐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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