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가르침과 이적이 본격 나온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2
일군들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와 비슷한 느낌의 비유다. 아직도 이 비유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과 천국, 구원을 사랑하는 데에 저런 적극성이 필요하다는 건가? 뒤에 15장의 이방 여인에 대한 일갈과 더불어 이때의 예수는 자기 사역의 보편성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뒤에 가서야 다른 깨달음을 얻으며 성장한다는 분석이 오히려 이해가 되는 장면이다.
특히 이 13장에서 비유로 설명하는 이유를 얘기하는 것은 상당히 껄끄럽다. 자신에 대한 사랑-비록 그것이 대중의 허황한 기대에 기반하여 언제든 비수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만-과 기대를 가지고 눈을 초롱초롱 뜬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그 뒤에 가서 '이해 못 할 놈들은 이해 못 해도 좋아'라고 하는 것은, 비열하고 배신감 마저도 느끼게 한다. 이유가 뭘까? 싶은 마음에 단서를 찾아보다 그 아래 구절, 제자들에게 비유의 뜻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마 13:15
일부러 비유로 감춘 것이 아니라, 완악한 마음 때문에, 받아들이려는 마음 자체가 없었기에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여기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 '이해를 하지 못했노라'고 고백한 제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성경만 봐서는 여기서 사람들이 이해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 앞의 구절 "천국의 비밀을 하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는 말씀은 또 혼란스럽게 한다.
37절부터 42절까지의 '가라지의 비유'는 요즘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근거가 아닐까 싶다. 2000년 전에 쓰여진 성경을 읽는 것은 이렇게 설렘과 절망의 반복이다. 어떤 말씀에는 희망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어떤 말씀에서는 증오의 깊은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마 15:24
역시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혹시나 해서 옆의 주석을 찾아봤더니 뭐 구구절절 변명이 대여섯가지 이어지지만 그야말로 구차할 뿐이다. 첫번째 근거는 예수의 공생애는 효율을 위해 유대에만 국한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웃기는 얘기다. 예수가 3년 공생애를 통해 유대 지역 선교를 완성했다면, 또 그렇게 해서 타 지역 선교에 도움을 받았다면 모를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심지어 그 앞장에 나오는 '유대 땅을 두루 다 다니기까지 하늘나라가 임하지 않으리라'라는 말씀을 보면 애초에 예수는 그저 유대 선교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초기 예수의 가르침과 후기 예수의 성찰에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오히려 속편하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이 말씀이 그 오랜 시간을 견디며 성경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결격사유가 있음에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예수 스스로 자신의 편견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오늘의 이방인에게 향한 교인들의 자세에도 일말의 해법이 존재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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