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피쉬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여정 중에 공터 하늘에 걸린 신발들이 주인공을 맞았던 장면과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하나둘 등장하던 장면 그리고 환상인가, 강물에서 커다란 물고기를 놓아주는 장면 정도 기억날 뿐이다. 하나 더 있다. 영화에 선뜻 동의되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아니 기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엔 늘 반감을 느꼈으니.
아버지가 여든줄에 들어가시기 전에 아버지의 회고록을 만들려 한 적이 있다. 나로서는 그게 일종의 아버지와 화해의 방법이기도 했을 게다. 방법은 잘 때 아버지 곁에 누워 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청해 듣는 방식이었다. 한 3일했을까? 이틀인가? 하다가 공책을 집어던졌다. 워낙에 허풍이 많았다. 그때 별로 아버지의 인생에 동의가 되지 않았던 터라 그 영웅 서사를 대필할 마음은 눈꼽 만큼도 없었을 게다.
영화 빅피쉬를 보면서 그런 마음이었을까? 아버지의 허풍도 사실이라면? 일제 징용에 끌려가 배에 오르려고 부두에 쪼그려 앉아서 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 6.25 때는 정보부 소속으로 전방으로 탄약을 실어나르다가 옆 산이 훤히 밝아져 돌아봤더니 탄약상자에 불이 붙어 있더라는 이야기.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탄약 상자에 올라가 옷을 벗어 불을 껐다는 이야기는 빅피쉬의 이야기보다는 사실에 가까울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과거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굳이. 굳이라는 말이 맞겠다. 왜 굳이 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과 부합해야하는가? 아버지의 서사를 의심하는 건 빅피쉬의 주인공과 내가 다를 바 없지만 그 허풍에 분개하는 주인공도 이해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허풍을 사실이라고 증명해줄 수 있는 작가 혹은 신이 내게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가 날 낳은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길고 긴 말년. 그 시간의 무기력은 어쩌면 아버지의 기억과 현실과의 간극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뤄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그래서 뭐 어쨌다고. 뒤늦은 깨달음은 오늘을 살아야 할 내게, 오늘을 살았어야할 아버지의 무능과 화해하는 데에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 빅피쉬의 이야기가 선뜻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십수년 만에 뮤지컬로 다시 접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가시고 난 뒤 십 수년, 나는 더욱 아버지한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부인하고 거리를 두려 했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아버지의 서사를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