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빈 인 더 우즈 (2012)
The Cabin in the Woods
8.1
자기 반영.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로맨스 장르를 만드는 작가를 작품 안에 끌어들였다. 일상과는 거리가 먼, 연애 판타지에 대한 모든 작위성을 드러나지 않게 봉합하려고 했던 것이 이전 작품들의 미션이었다면 시라노는 그런 작가의 행위를 전면에 내세운 셈이다. 이건 서사가 일상의 레퍼런스가 되어 버린 현재를 솔직히 반영한다. 이미 우리는 일상이 이루지 못하는 판타지를 구현한 서사들을 다시 레퍼런스로 삼아 현실에 복제, 구현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건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엔 소심하고 창의가 모자란 이들에게 탈출구가 된다.
서사가 일상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현실을 다시 서사로 차용한 게 '시라노...' 였다면, '클로버필드'를 연출한 드류 고다드의 두번째 영화 '캐빈 인 더 우즈'는 이런 메카니즘을 고스란히 공포라는 장르로 끌어들인다. 공포 장르 생산 공정에 대한 자기 반영이랄까?
'캐빈 인 더 우즈'는 산장으로 놀러간 청년 다섯명이 살인마를 만난다는 공포 영화의 클리쉐에 이를 연출하는 조직이 있다는 플롯이 병렬로 놓인 구조다. 고대로부터 희생 제의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대중 속에 공포 장르를 만들고 있다는 설정은 장르에 대한 재기 발랄한 농담일 뿐이다.
이 영화가 재밌는 것은 장르 영화를 디자인 하는 작가의 행태가 이 제의를 관장하는 스태프들에게 고스란히 투영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히라시노 게이코의 '명탐정의 규칙'의 시선과도 상통한다. 왜 살인자들은 굳이 밀실 트릭에 집착하고, 고드름 칼같은 걸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가? 모두 진부한 작가의 자기 만족이라고 단정하듯이, 케인 인 더 우즈의 스태프들도 진부한 제의에 필요한 희생물들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 4년 장학생을 마초 운동선수로 둔갑시키고, 금발 창녀를 만들기 위해 페로몬을 동원한다.
공포 장르에서 어이없이 반복되는 '왜 하필'의 상황은 제의를 성공하기 위한 스태프들의 몸부림의 결과가 된다. 마치 작가들이 책상 머리에서 머리를 쥐어짜듯이.
장르 창작에 대한 유쾌한 비틀기는, 이렇게 캐릭터와 작가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바탕에 깔고 있어서, 혹자는 금융자본이 대중을 착취하는 구조로 읽기도 한다. 실제로 청년들의 선택지를 놓고 내기를 벌이는 장면은 월가를 연상케도 한다. 그러나 그것뿐이랴? 극중 한 인물이 발견하는 진실 - '우리는 꼭두각시였어'가 적용될 수 있는 관계라면 그 어떤 은유로도 분석이 가능할 터.
연애에 대한, 공포 장르에 대한 자기 반영이 그럴듯하게 성취되는 모습에, 다른 장르에 대한 자기 반영 서사는 어떻게 가능할지 궁금하다. SF에 대한, 스릴러에 대한 자기반영 서사는 가능할까? 모르겠다. 또 어떤 천재가 그 미션에 성공할지도. 그러나 바울이 얘기했듯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선한 것은 아닐'지도.
아마도 그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변수는 대중들의 수용력. 다시 레퍼런스의 얘기로 돌아가서 대중들이 현재 얼마나 그 장르의 서사를 일상의 판타지로 수용하고 있느냐에 따라 갈리지 않을까? 로맨스 장르가 일상의 이벤트로 복제되고, 공포가 테마파크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것처럼 우리 일상에 레퍼런스로 작용하는 장르인지가, 이 새로운 서사에 대한 성패를 가름하지 않을지.
재미 한가지. 캐빈 인 더 우즈는 클로버 필드나 스티븐 킹의 미스트의 훌륭한 프리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