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외국 책들을 보면서 가장 부러운 것이 이런 2차 저작물들이다.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명저에 그림과 해설을 곁들여서 펴낸 이 책처럼 서양 책들 중에는 이런 2차 저작들이 꽤 많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나라에는 그런 2차 저작이 먼저 들어오는 예가 흔하다는 거다. 내가 처음 그런 책을 접한 것은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란 책이었다. 몇 권으로 출간된 원저를 그림과 함께 풀이한 책인데, 까치 출판사에서는 그 책의 축약본을 냈다. 이름만 듣던 책들을 그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지만, 척박한 인문학 환경을 드러내는 사례라 생각한다.
지금 이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도 니덤의 원저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모양이다. 까치 출판사에서 상하권으로 축약본이 나왔다고 한다. 자, 그럼 이 책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중국의 발명품 하면 종이, 화약, 나침반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에 상당부분 근대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상당히 많은 것들이 - 아마 거의 모든 기계의 원류들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도 하는 외발 수레를 비롯해서 동력 전달 체계, 금속 제련 기술, 비행술, 출판 인쇄술 등 문명을 들썩일만한 것들이다. 읽으면서 니덤의 주장에 의심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그 당시 이런 발명들을 해낸 각각의 주체들을 모두 중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민족의 개념이 없었고, 교통도 발달하지 않아 서로 유리된 삶을 살던 사람들의 파편처럼 흩어진 발명들인데 말이다. 일례로 이 책에는 지하 소금물을 채취해 소금을 공급하기 위해 채굴 기술을 발전시킨 산악지방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기록은 남쪽의 관리가 북쪽을 순시하면서 남긴 것이었고, 그 기술은 이후 중국 남부로 전해지지 못한다. 여기에 실린 많은 기술들이 그렇게 특정한 지역의 특별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명, 발전된 것들이다. 물론 지금의 영토로 본다면야 모두 중국의 영토인 데다가, 또 달리 누구의 과학과 문명이라고 할 거냐 묻는다면 중국 외에는 달리 붙일 이름이 없긴 하지만, 이것이 단일한 주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광활한 영토 내에서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서 개발되어 온 지식의 축적이라는 관점을 역사를 대할 때 상당히 중요하지 싶다.
왜냐면 그것이 지금의 동북공정이나 해양굴기처럼 중국이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국사나 사극에서 여전히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서 돌궐이나 여진과 같은 이 한반도를 공유한 다른 주체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당하는 여러 불합리를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역사를 대하는 다른 시선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 한가지 드는 의문은 이런 발명들이 왜 축적되어 근대를 여는 동기와 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사실은 이게 가장 궁금한 점이다. 이토록 문화와 경제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토대가 있었음에도 왜 이들은 이것을 딛고 근대를 여는 선구자가 되지 못했을까? 단지 왕정의 폐해로만 설명되기에는 너무 미스터리한 게 많다. 이 책이 그런 얘기까지 해줬더라면 앞의 문제와 함께 상당히 미래지향의 가치와 이슈를 던져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중국이 옛날에 그랬다며? 하는 정도의 감흥 외에는 별로 얻는 게 없는 책이다. 그럼에도 감춰진 중국 문화의 저력은 상당한 인상을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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