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과학혁명의 구조

자카르타 2012. 10. 15. 12:10


과학혁명의 구조

저자
토머스 S. 쿤 지음
출판사
까치 | 2007-04-20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뛰어넘어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에 이르기까...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읽지도 않았으면서 술자리에서의 수다에서 얻은 지식으로 혹은 다이제스트에서 얻은 짧은 상식으로 읽은 척하는 책들이 종종 있다. 이 책 <과학혁명의 구조>도 그렇다. 언젠가 연구소의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서 들었던 얘기를, 난 진짜 이 책의 주장인 양 믿고 또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참 쪽팔린 일이다. 무지는 무지 안에서만 살 수 있다. 

술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토머스 쿤이 말한 과학혁명은 즉,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미 사회 저변에 그것의 변화를 받아들일만한 토대가 갖춰져 있을 때 비로서 실현된다는 얘기였다. 그 얘기가 이 책의 내용과 아주 상충되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이 책과 엇갈리는 지점들이 있다. 하나는 이 책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과학'은 엄연히 '기술'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산업혁명을 낳은 증기기관의 발명처럼 거대한 사회의 토대를 바꾸는 '기술 혁명'과는 달리, 토머스 쿤이 말하는 과학혁명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아주 작은 과학자 공동체에 머물수 있음을 강조한다. 

또 토머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과학자 공동체 안에 암묵적으로 수용되다가 표출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소수의 지지자들이 기존의 패러다임 지지자들과의 지난한 경쟁을 벌이다가 결국 과거의 패러다임을 대체하게 된다. 이 과정을 기술하면서 토마스 쿤이 수차례 강조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이 선형의 쌓이는 과정이 아니라, 이전의 성과와 단절된 불연속의 과정임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를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패러다임이 다뤘던 문제들을 소급해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애써 틀린 기억과 이번에 읽은 내용을 비교하는 것은 그만큼 오래 묵은 기억일수록 밀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 이 책에 대한 설왕설래, 혹은 선입견, 그리고 이 책에서 아주 유명하게 된 '패러다임'이란 용어의 쓰임새가 이 책에서 말한 것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나는대로 정리해 보면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자 사회(이 번역을 '과학자 공동체'라고 하자), 정상 과학, 패러다임의 용어를 내 식대로 이해한 그림을 그리면 이렇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으로 사회변혁을 설명할 생각이 없다. 오로지 특정 과학계, 과학자 공동체가 대상으로 삼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상 과학'이다. 정상 과학은 그림에서처럼 어떤 과학의 성취 이후에 그보다는 작은 자잘한 문제 해결을 통해 꾸준히 발전을 해나가는 과학을 말한다. 여기에서 '패러다임'은 당연히 정상과학의 상태를 가능케 하는 발단 즉, 제일 앞의 성취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문제해결은 '패러다임'이 바뀌어 과학자 공동체가 얻게 되는 수확이다. 


토머스 쿤은 패러다임 이후의 정상과학은 일종의 퍼즐 풀이라고한다. 마치 정해진 밑그림에 그림 조각을 채우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그 안에 세계관처럼 큰 가치관으로 시작해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 문제를 푸는 도구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패러다임은 자신의 세계관으로 인지되는 문제만을, 그리고 그 패러다임으로 만들어진 도구로 해결가능한 문제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쿤은 이러한 정상과학의 상태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패러다임이 있기 전에 과학계에는 발전이라곤 없었다고 주장한다. 서로 비슷한 주의주장들이 백가쟁명하는 상황의 반복일 뿐이라는 얘기다. 패러다임은 이런 소모적인 논쟁과 분열을 없애고 작지만 꾸준한 발전을 이루게 한다. 그러나 이런 정상과학에 균열이 오고 결국 패러다임을 교체해야하는 시기가 오는데, 그것의 징조는 이런 퍼즐외에,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늘어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 책은 이 외에도 패러다임의 변화를 과학자 공동체가 어떻게 수용하게 되는지, 그 징후를 누가 포착하게되는지 등 과학혁명 혹은 패러다임의 변화와 연관된 많은 현상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재밌었던 것은 이 책은 정상과학의 상태에 있는 과학계가 그 안에 품고 있는 패러다임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 즉, 과학교육과 과학교과서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나 역시 물리학을 잠시 전공한 적이 있지만, 이 책을 읽고야 왜 그토록 비슷한 방식 - 이론을 설명하고 비슷한 문제들을 되풀이해서 풀어야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또 재밌는 것은 과학 교과서에서 말하듯 어떤 특정한 날 특정한 인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발견과 발전은 드물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화학에서는 라부와지에의 산소발견과 다른 굵직한 사건들을 들고 있는데, 아주 신선한 얘기였다. 뉴턴의 만유인력이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 이전에 사람들이 주장하는 물질 본유의 성격 - '불은 원래 뜨거운 성격이 있어' 등등- 처럼 동어반복의 퇴행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상당히 새로운 얘기였다. 그런 퇴행에도 뉴턴의 만유인력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패러다임을 항상 능가하는 것도, 이전의 패러다임이 풀지 못한 것을 모조리 푸는 것도 아니라고, 쿤은 계속 주장한다. 


쿤은 이 '패러다임'의 개념과 '정상과학'의 모델을 여타 다른 분야에서 발견한 것을 과학계에 응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쿤의 의도나 설명과는 달리  이제 쿤의 '패러다임'은 거꾸로 다른 영역에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 그만큼 명료한 모델이라 그렇지 않을까? 지금의 정치 상황에도 적용이 가능할 듯 하다. 과거의 프레임으로는 더 이상 이 복잡해진 시대를 설명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때, 기득권층이나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세대와 계층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권교체도 그런 의미에서 패러다임 쉬프트가 아닐지 모르겠다. 문제는 교체할 선수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놓느냐겠지만.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주론  (0) 2012.12.01
조선의 뒷골목 풍경  (0) 2012.11.08
비거 요약   (0) 2012.10.02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0) 2012.09.29
밥벌이의 지겨움  (0) 2012.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