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공연전시

상상의 웜홀 전

자카르타 2012. 12. 22. 18:31

김진송 선생의 상상의 웜홀 전을 보고 왔다. 톱니바퀴와 축, 캠과 같은 동력 전달부를 나무로 깎아 움직이는 인형들을 만들고 거기에 이야기를 덧입힌 작품들이다. 전시된 작품 중 반 정도가 움직이는 인형들. 또 일부는 삽, 공사장 자재 등을 재활용한 정크 아트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장 입구. 바닥에 떨어진 그림자가 에셔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총천연색 꿈 속으로 가자고 설레발 치는 새들.




이분이 쓴 책도 제목만 들었지 읽은 게 없다. 작가 소개를 보니 2004년 첫 전시를 했네. 그러니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어림잡아 10년치 공력이 들어간 작품들인가 보다. 
제목은 왜 <나무로 깎은 책벌레이야기>에서 <상상의 웜홀>로 바뀌었을까? 다른 시공간을 잇는 벌레 구멍이란 뜻에서 였을까?




오토마타. 저절로 움직이는 기계라는 뜻이란다.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나 해외의 이 분야 전통 유산들을 보면 태엽을 사용하는 걸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그때 그때 사람들이 돌려줘야. 사람이 돌리는 속도에 따라 인형들이 움직이니 마치 인형들 연출자라도 된 듯한 기분을... 도슨트들은 느꼈겠지? 전시물의 안전을 위해 관람객들은 건드리지 못하는 게 아쉽다.




전에 후쿠오카의 어느 호수 공원에서 돌아다니던 잉어가 생각난다. 마침 관리인이 먹이를 줄 때였는데, 왜 그랬는지 관리인은 허리춤까지 차는 물에 들어가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 다리 사이를 관리인 다리만한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을 한동안 넋놓고 있었다. 
그 물고기들. 긴 수염 붙이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내게 '넌 어떻게 생각해?'라고 믿도 끝도 없이 묻는 것 같은 그 얼굴이 떠오르네.




높은 하늘에서 땅 위를 굽어보는 솔개, 독수리, 말똥가리 혹은 다른 무엇을 상상해 본다. 포유류는 영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을. 
하늘에 엎드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양 날개를 보이지 않는 바람에 얹고서 깃털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올 한 올 감각을 느낀다는 것은?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순간이 즐거워 사냥에 나서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토마타 대부분이 저렇게 아래 구동부가 훤히 드러나도록 했다. 아무리 복잡한 세상사라도 사실 움직이는 동기나 원리는 이렇게 단순한 거야. 뭐 이런 얘기라도 하는 듯. 그러나 막상 들여다 보면 원리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아니 원리는 단순한데 눈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뭔 소린고 하니. 이 오토마타들의 운동이 크랭크 축 한바퀴가 주기가 아니라는 거다. 어떤 움직임은 축을 한바퀴도 못돌려도 한 움직임(공업시간 용어로 쓴다면 '행정')을 완료하지만 어떤 움직임은 축을 몇 바퀴를 돌려야 한 행정이 완료된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저 아래 맨 뒤에 보이는 입벌린 팩맨 같은 부품이다. 캠이라고 하는데 저 캠은 마치 LP판처럼 사물의 움직임을 시간에 따라 변형시키는 일종의 기록장치라고 볼 수 있다. 

저 캠은 아주 간단한 형태지만 다른 작품의 캠은 복잡하게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어서 섬세하게 인형들이 움직이도록 한다.




이건 아래부분. 
자세히 보면 부품들 작가가 부품을 가공할 때 안내선으로 그렸던 먹선, 연필 표시 선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도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이건 앞서 봤던 오토마타의 이야기. 이렇게 대부분의 작품들에 각각 다른 이야기들이 짝을 이룬다.




이 장치는 '탈진 바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진자의 움직임을 벗어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게 가장 많이 쓰이는 - 그리고 이게 없으면 안되는 기계가 바로 시계다. 대부분의 시계의 초침은 1초가 지나야 째깍하고 움직인다. 그 1초를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게 했다가 1초가 되면 쇄기를 풀어주는 장치가 탈진장치다. 

여기서도 축을 돌리면 돌리는 대로 인형이 계속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정해진 간격으로 한 발 한 발 움직이게 하는 장치로 저런 탈진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앞의 독수리는 일러스트에서 많이 본 그림 같고. 재밌는 건 저 뒤의 작가의 스케치 같은 사진들. 작가 상상력의 속살을 들여다 보는 재미.




설계도랑 공구를 들여다봤으면 작가의 속살은 다 본 셈이 아닐지. 이런 수작업 공구만 쓴 게 아니라. 영상을 보면 선반도 썼더라. 선반이라고 하는 건가? 하여튼 머신들.

언젠가 목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한가지. 목수들은 이 연장들을 어떻게 설명할까? 마치 하나하나의 성격을 규정해 사용하지 않을까? 가령 이렇게. "이 장도리는 여기 저기 나서길 좋아하는데 목수가 가려서 쓰지 않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십상이에요."




해체된 부품들은 주름과 같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잠이 든 부품들.




이렇게 나무의 원래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한 것들도 몇개 보인다. 
작가는 다른 목수처럼 나무라는 소재에 천착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가 펼치고자 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재료 중 하나일 뿐. 거기에 적합한 것이라면 작가는 나무든 쇠든 가리지 않는다. 

전시 볼 땐 그렇게 생각했는데 또 지금 생각하니 작가는 모든 재료에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리석 덩어리에서 다비드의 모습을 봤던 미켈란젤로처럼 재료가 뭣이든 그 재료가 품고 있는 이미지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아닐까?




잦은 나비의 날개짓이 이어지면 여자가 벌떡 일어난다. 그것은 가위였을까? 엑스터시였을까?




개와 의자의 진화, 라는 작품. 
얼마 전 인터넷에서 개를 키우는 주인들을 위한 의자가 생각나네. 

개와 사람과 의자의 토폴로지. 그 상상력에 궁금하기 보다는 자기 내면의 소소한 상상력에 귀를 기울이는 작가의 섬세함, 열정이 부럽다.




이렇게 못쓰는 쇠붙이들도 만든 작품들도 보이고.
노리단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쓰레기로 만들었다'는 것은 별로 박수칠만한 가치는 아니다. 모든 쓰레기를 그렇게 재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만든 작품도 본질상 잉여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을 그 대상이 고착된 맥락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체와 그 해체된 몸이 다른 맥락에 퍼즐처럼 들어맞았을 때의 쾌감이다. 물질의 해탈과 열반이랄까?




아, 저 눈 좀 봐. 삶에 골몰하는 곤충들의 눈. 딱이잖아. 그게 공장의 흔하디 흔한 너트라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으하하. 이 땡중의 고추 좀 봐. 머리는 꼭 갑오징어 같고. 갑오징어 머리엔 내장이 들었다지? 아닌가? 내장이 들었으면 그건 몸통이지. 음... 하여튼 갑오징어 머리에 뭔가 미스테리한 부분이 있었는데. 

암튼 고추 대신 발기한 머리를 지닌 땡중. 그의 하반신이 바퀴인 것은 왠지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은유를 품고 있는 것 같아.





리뷰를 하다보니 정말 사진을 대충 찍었구나. 그리고 왜 이렇게 안찍었지 싶네. 이건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작품. 

뉴욕의 마천루를 연상케하는 도시. 그리고 유정의 거대한 뭐시기. 거기에 그림자를 드리운 검은 새. 오토마타에는 프로젝터로 영상이 뿌려진다. 뭐라고 뒤에 막 써놓기는 했는데 읽기 귀찮아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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