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20130716

자카르타 2013. 7. 17. 21:20


드디어. 볼펜을 다 썼다. 정확히 얘기하면 가방에 넣고 다닐 한 개를 빼놓고지만. 
내가 볼펜을 마지막으로 산 게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늦깍이 입학을 하면서 꼴에 만년필만 쓰겠다고 한 게 97년도니 볼펜을 사지 않은 건 거의 16년 되었나 보다. 

이상하다. 그런데도 내 필통엔 볼펜이 가득했다. 어느 행사장 기념으로 받은 것, 사무실 비치용을 쓰다가 집으로 가져온 것, 심지어는 미용실에서 개업 기념 글귀가 찍힌 것까지. 

가끔 필통을 보면 뭔가 내 삶의 군더더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제 정리에 들어간 게 올 2월. 필기감 영 안좋은 거 버리고 남은 게 대여섯개였나? 차근차근 써버리자고 마음을 먹고 만년필을 잠시 접어뒀다. 

드디어 오늘. 마지막 볼펜을 다 써버렸다. 젊은 볼펜 한 녀석을 다 쓰려면 A4지 50장 정도를 써야하는 것 같다. 용량따라 다르겠지만 한 3주 정도 걸린다. 그런데 이번에 볼펜들을 다 쓰면서 알게 된 건데. 오래된 볼펜은 잉크가 심지 벽에 말라 붙어서 심지에는 가득 차 있어도 정작 얼마 못가 흰 볼을 드러내고 만다. 

남은 녀석들 중 대부분이 그렇게 말라붙어서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쓰고서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중도 탈락하는 녀석들 자리는 곳곳에서 돌출하는 복병 볼펜들이 다시 채우고. 한 여서일곱 개의 볼펜을 썼나 보다. 이제 당분간 볼펜을 사는 일은 없을 성 싶다. 다시 로트링 EF만년필을 꺼내 잉크를 채웠다. 

아직 필통에는 연필 서른 자루가 있는데 이건 또 언제 다 쓸지. 애쓰지 않고 강박에 빠지지 않고 어찌어찌 쓰다보면 또 다 쓰게 되지 않을까. 글 보다 필기구 줄어드는 데서 뭔가 성취감을 느낀다니 어처구니가 없긴 하지만 이 역시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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