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엘레우시스 게임 Eleusis Game'이란 게 나온다.
'예언자 게임'이라고도 하는데, 게임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신이 정해지고 신이 어떤 규칙을 종이에 적어놓는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숫자가 적힌 카드를 넘기면, 신은 그 규칙에 맞는지 안맞는지 밝힌다. 어느 정도 규칙이 감지가 되는 사람은 손을 들고 '예언자'를 자칭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드들이 '신의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말하고 신은 이를 점검한다. 열 번의 기회 동안 예언자가 신의 규칙을 알아내면 예언자 승리, 참여자 중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면 신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간단한 게임이지만 이상하다. 앞으로 나올 카드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규칙을 알아맞추는 게 왜 예언자일까? 의외일 수 있지만 이 게임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고 기독교에 기반한 서구 철학에서 말하는 '예언'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자'는 미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확하게 이 게임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금' '이곳의' '우리가' 신의 섭리에 맞게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이 예언자다. 즉, '현재'를 통찰하고 설명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일이다.
구약 사사기 시대 예언자들의 예언은 조건문으로 구성된다. '만약 너희가 하나님을 따르면, 너희가 승리할 것이다.' 뭐 이런 식이다.
조건문의 앞 구절 '만일 00하면'으로, 예언자들은 현실을 구원할 율법(정언명령)의 회복을 꾀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이런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예언자들의 열전인 사사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갈 길을 알려주는, 해야할 일, 지켜야 할 일이 뭐라는 것을 알려주는 정언명령의 부재를, 사사기의 기자는 '왕'이라는 권력의 부재로 표현하고 있다.
묘하게도 영화 <관상>은 이런 정언명령의 부재 혹은 왕의 부재 속에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이전투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관상이 진실을 얘기했는지, 아니면 관상을 따르는 사람들의 욕망이 사실을 변하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 문제는 오이디푸스가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에서 벌써 정리가 되고,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에서 확인이 된 문제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고. 아무튼) 중요한 것은 내경의 대사처럼 이 인물들이 '바람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내경이 수양대군의 측에 서게되지만 딱히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의 동병상련 정도일까? 그러나 한명회의 협박 내용을 생각해 보면 김종서에 그토록 올인한 이유도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실수라기 보다는 내경의 행동에 가장 유력한 동기와 근거, 확신을 부여했던 것이 그저 한낱 '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영화가 상당히 흡입력 있게 진행됨에도)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내경의 고통에 크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아니 공감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보다는 웃을까 울까 망설여진다고나 할까? 우매한 자의 실패를 비웃어야 하는지, 좌절된 고매한 의지와 부당한 응징에 분노해야하는지 헷갈린다. (아 졸려. 뭐 더 할 얘기가 있었는데.)
이렇게 쓰면 영화를 상당히 재미없게 본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요약하면 플롯은 잘 짜여졌고, 몰입감은 최고다. 그러나 끝에 뜬금없는 소격효과가 있다. <데스티네이션>과 비교할 수 있을까? 내경이 바람에 떠도는 헛된 기표 '관상'에 끌려다니는 모습은 데스티네이션의 주인공들이 운명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과 대칭을 이룬다. 그리고 데스티네이션에서 악역이 있다는데 누굴 미워해야하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던 것처럼, <관상>은 좀처럼 주인공 내경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이미 <데스티네이션>에서 본)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꾸미는데 플롯을 소진하고 정작 주인공 내경이 운명에 개입할 때 무엇을 배팅하는지 무엇을 오판했는지를 보여주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바람을 보지 못했다는 말은 그래서 작가의 변명이다. 보지 못했음을 말로 털어놓을 게 아니라 무엇으로 잘못보았는지를 제시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쉽지는 않지. 지금도 썩 좋은 영화다. 이렇게 공들여 곱씹게 할 정도로.
<시퀀스 요약>
1. (프롤로그) 자객에 대한 불안에 떠는 한명회.
2. 기생 연홍이 관상쟁이 내경에게 스카웃 제의를 한다. 내경의 아들 진형은 양반으로서 입신양명을 꿈꾸고 있다. 진형과 달리 내경은 역적의 자손으로 입신양명은 포기한 상태. 대신 연홍의 제의를 받아들여 돈을 벌려고 한다.
3. 연홍은 내경과 (내경의 조카) 팽헌과 노예계약을 맺어 강제로 관상을 보게 한다. 내경은 여기서 벗어나려고 사헌부의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고 이로서 무사히 해결해 낸다. 그러나 수양의 측근을 검거한 탓에 살해 위기를 당하고 김종서 측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다. 이후 내경과 팽헌은 김종서의 사람이 된다.
4. 내경은 신입 관리들의 관상을 보며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이야기가 임금의 귀에 들어가 문종은 내경을 찾아와 은밀하게 지시한다. 유력인사 중 역모를 꾀할 상을 찾아내라는 것. 가장 의심스러운 수양대군을 만나지만 내경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보고한다. 이후 문종이 죽는데 내경은 자신이 봤던 수양대군이 실제 인물이 아니었음을, 수양대군은 역모의 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내경의 아들이 장원급제로 입조한다.)
5. 수양대군 측의 (얼굴을 모르는) 책사는 내경을 협박해 김종서가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내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내경은 김종서에게 수양대군을 견제할 것을 아뢴다. 김종서는 단종에게 수양대군을 견제하라고 하지만 단종은 오히려 수양대군에게 의지한다.
6. 내경은 수양대군의 책사를 찾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낙심한 내경은 단종이 관상책을 보고 있음을 알고 관상책의 기록에 따라 수양대군을 완벽한 역모의 상으로 만든다. 단종은 수양대군의 상을 보고 김종서에게 수양대군을 치라고 지시한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칠 만반의 준비를 한다.
7. 그러나... 수양대군의 승리. 내경과 아들 진형의 운명.
8. 한명회의 운명.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