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원작에 <그을린 사랑> <프리즈너스>를 만든 드니 빌뇌브의 연출인데...
제이크는 역사학과 교수다. 그는 어느날 우연히 영화 속에서 자신과 꼭닮은 배우를 발견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그의 삶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순간이다. 그의 스토킹은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아준다. 그만큼 그가 그 배우와 닮았기 때문이다. 배우의 집과 전화번호까지 알아낸 제이크는 드디어 전화를 걸고 배우와 만나기로 약속한다.
한편 배우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하고 제이크를 확인하기 위해 학교를 찾는다. 그리고 제이크를 확인하고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배우는 제이크와 만난자리에서 배에 난 상처를 얘기한다. 숨겨놓은 어마어마한 과거와 마주칠 것이 두려워 제이크는 도망을 친다. 이제 관계는 역전이다. 배우는 제이크를 스토킹하다가 제이크의 미모의 애인을 보게 된다. 배우의 아내는 지금 만삭이다.
배우는 제이크를 협박해 제이크의 애인과 하룻밤을 보내려고 한다. 그 시각 제이크는 배우의 집으로 들어가 배우의 행세를 한다. 격렬한 정사를 벌이는 배우와 달리 제이크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데... (하이라이트 생략)
주제 사라마구의 이야기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그의 이야기에 어떤 개연성을 찾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이 영화에서는 교수와 배우의 관계가 어렴풋이 샴쌍둥이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아니, 실은 주제 사라마구 답지 않게 이 이상한 현실에 각주를 다는 것이 상당히 낯설었다. 아무튼 전작인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은유를 했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은유가 숨어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번 영화에서 그가 쌍둥이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뭘까?
과학에서는 실험군과 대조군이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가설을 실험으로 증명하려고 할 때 다른 조건들은 동일하고 가설과 관련된 것만 다른 두 쌍 - 실험군과 대조군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번 얘기에서 등장하는 두 명의 쌍둥이들은 외모와 목소리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다르다. 교수는 안으로 수렴하는 사람이라면 배우는 모든 것을 밖으로 발산한다. 교수는 지식을 파는 사람이고 배우는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사는 환경도 다르다. 배우가 상당히 고급스런 환경에서 살고 있으면서 아름다운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 등 그 나이의 남자가 갖춰야 할 것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 반면, 교수는 - 자신의 교수실이 없는 걸로 보아 - 보따리 장사를 하는 강사 신세에 허름한 아파트, 그리고 연인과의 관계도 소원한 상태다. 두 사람은 그렇게 외모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다르다. 그러나 어찌보면 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다.
누가 봐도 모자를 것 없는 상황의 배우가 교수의 여자를 탐내는 것이나, 배우의 만삭인 아내가 교수에게 보이는 반응 등이 겉으로 드러난 기울기와는 다른 내면의 기울기가 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불균형이 교수의 스토킹과 배우의 협박 사기로 대류 활동을 일으킨 뒤에 찾게 되는 균형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영화는 이 불균형 상태의 대기를 한껏 휘저은 다음 새로운 배치를 보여준다. 주제 사라마구가 의도한 것은 이러한 재배치가 현대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려는 것일까? 그 결과는 마치 진화 과정에서 열성 인자들의 필터링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엔트로피를 거스른 축적과 진화의 작위를 고발하려는 거?
그런 면에서 마지막 장면, 교수의 시선에 비친 거대하고 끔찍한 환상은 그 그물에 걸려든 현대인들에 대한 비아냥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것이 과연 타당한 영화인지, 의문이다. <눈먼자들의 도시>에 비해 현저하게 재미가 떨어지는 이야기이다. 굳이 뭐 이런 이야기를, 이라고나 할까?
멜라니 로랑은 이렇게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 좀 더 멋진 배역을 맡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