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는 봤으나 안 본 것과 매한가지인 영화들이 있다. 뭐 영화 뿐이랴? 책도 그렇고 여행도 그렇고, 망각의 강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세월이 바로 망각의 강이지 싶다. <블레이드 러너>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언제 봤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아마도 숀 영이라는 배우 때문에 보지 않았을까 싶다. 아쉽게 영화에서는 극히 미미한 역할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물론 비디오였고 4:3화면으로 봤을 게다. 요 얼마 전에 VHS로 비디오를 틀어본 적이 있는데 이제 DVD급에 익숙해져서 VHS화질은 도저히 참아내질 못하겠더라. 그렇게 원작과 달라도 한참 다른 매체를 통해 감상한데다 내용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건 뭐 안 본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래도 언젠가 다시 보리라고 다짐하고 있었던 건 이 영화에 대한 찬사들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SF의 새 지평을 열었다거나 리들리 스콧의 최고 걸작이라는 수식이 따라 붙는다. 하지만 과연 그런 찬사에 걸맞는 영화일까, 의문이다. 서사는 지극히 빈약하기 그지없다. 도망친 안드로이드를 찾아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인 해리스 포드가 다섯 명의 안드로이드를 차례로 찾아 제거하는 게 이야기의 전부이다.
애초에 네 명이었던 숫자는 레이첼(숀 영)이 합세하면서 다섯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해리슨 포드는 숀 영과 사랑에 빠지면서 마지막 제거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플롯으로 치자면 '고양이와 쥐'의 플롯인데 추적하는 과정이 너무 단순하다. 사실 이 영화에 쏟아지는 찬사들은 사실 리들리 스콧이 펼쳐낸 영상미에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프레임들은 4:3화면으로 잘라내도 이야기 전개에 별로 무리가 없다. 프레임 안에서 여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여백. 이 영화의 스타일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화면의 여백에 영상의 스타일을 담아내듯이 편집에서도 굳이 담을 필요가 없는 여백의 시간들 - 가령 이동하면서 보여지는 주변의 풍광들 같은 - 이 지나치게 지루하게 제시된다. 그 풍광들이 전혀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오히려 당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볼거리가 충분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지나치게 반복이 심하다.
그리고 그 비주얼의 주요 요소들은 대부분 동양의 그래픽 자산에 의지하고 있는 면이 강하다. 즉, 서양인의 시선에서 그들에게 새롭고, 낯선 것들로서 동양의 이미지들을 차용한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것이 먼 미래의 이국 풍경을 묘사하는 데 적절한 전략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당대의 관점에서 얼마나 충격이었을지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기는 하다.
아무튼 명성에 비해 상당히 지루한 영화다. 한가지 이상한 것. 언젠가 감독이 새로운 버전을 냈다는 소문과 함께, 해리슨 포드도 역시 안드로이드였다는 것이 밝혀진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정말 그런지 궁금하다. 좀 그런 거라도 있어야 뭔가 흥미로울 텐데 지금은 밋밋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