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텔은 어느 바닷가 카페에서 위압감을 주며 추파를 던지던 남자들을 만난 뒤 숙소로 돌아온다. 샹텔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이유를 묻는 연인 장마르크에게 샹텔은 별다른 의미없이 언뜻 생각한 변명을 둘러댄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아'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은 샹텔의 이 의미없는 얘기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둘 사이의 파국을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절반 정도까지는 그저 작가의 상념을 하릴없이 쫓아가야하는가 보다, 무력하게 읽어갔는데 중간 이후를 가면서 상당히 플롯 중심으로 섬세하게 고안된 드라마를 따라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장마르크와 샹텔의 심리와 대화를 쫓아가면서 별 의미없는, 이들의 대화는 중요한 갈림길에서 꽤 의미심장한 이정표 구실을 한다. 일상의 소소한 세부들이 모여 일생을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짧은 중편의 구조에서 탁월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왜 이 책의 제목이 <정체성>인지는 잘 모르겠다. 현재의 자신과 관계를 규정하는 언어의 부정확성과 의미없음을 지적하려는 것일까? 그런 언어로 규정되는 관계와 개인의 혼란을 얘기하려는 것일까? 그건 두고 두고 생각해 봐야할 문제인 것 같다.
다만 인물의 내면을 깊이 들어가는 순간 조차도,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 조차도 단면만 보며, 그 단면이 다른 단면을 감추고 속일 수 있다는 것은 밀란 쿤데라의 대담성을 보여주는 대목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