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시적 정의

자카르타 2014. 7. 21. 20:55



시적 정의

저자
마사 누스바움 지음
출판사
궁리출판 | 2013-09-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법과 정의가 강자의 힘에 굴복해버린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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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모터스의 어느 공장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일하던 한 근로자가 동료 직원들의 폭언으로 퇴사를 하게 되었다며 회사에 소송을 건 재판이 있다. 회사측은 남자 동료들의 폭언은 노동자들 특유의 문화였으며 그렇게 원고에게 압박을 주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변명한다. 그 근거로 회사측 변호인은 여성인 원고가 남자들의 음담패설에 맞장구를 쳐주었던 일화를 제시한다. 그러나 판사는 여성의 그러한 행동은, 다수의 폭력에 노출된 소수가 다수에 동화되고자 하는 제스쳐였다며 원고의 승소를 판결한다.


<시적 정의> 저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 판사가 이러한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하게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개인의 고유한 경험에 대해 공감하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문학적 상상력이야 말로 ‘공평한(척 하면서 강자에게 유리한) 법’과 ‘효용만 따지는 경제’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몇 주 전 제주도에서 만난 한 남성은 올레길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유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전날 게스트하우스의 술자리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일정을 가해자인 남자에게 알렸다고 한다. 스스로도 근거가 빈약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피해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도 했다. 그 말은 진위도 논할 가치가 없는 얘기지만 그의 사고방식이 흥미롭다. 그의 머릿속에는 낯선 여행지에서 가슴 설레는 이성과의 만남을 은근히 기대하는 남자는 있어도 그런 여성은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설혹 ‘추파’를 던지는 여성은 살해를 당해도 마치 위험한 무기의 방아쇠를 당긴 것과 같은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우리 주위에 너무 흔하다. 영화 <한공주>도 비슷한 상황이다. 주인공 한공주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사실’에 대해 집착하면서 중립을 표방한다. 어느 누구도 가해자 43대 1, 가해자의 학부모 86대 1의 상황에서 한공주의 편이 되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찾아본, 가해자 중의 한명이라고 하는 남성의 글에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일용직 노동자이며 어머니가 다방 레지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관객인 나 역시 공주가 간신히 친구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녹화될 때, 행여나 그 영상이 공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지 불안했다. 남학생과 메신저를 주고 받으면 강간일리가 없고, 부모의 직업이 변변치 않으면 피해를 당해도 되고, 피해자는 비탄에 빠져있어야 한다는 빈곤한 상상력이 낳은 편견이다. (난 이 영화가 이 편견이 주는 불편함을 짚어낸 것, 이 새로운 인물-한공주가 스스로 다시 일어서려는 재기의 모습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훌륭한 통찰을 담았으며 그 후 비슷한 서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마사 누스바움의 ‘문학적 상상력’ 혹은 더 나아가 ‘서사의 상상력’은 낯선 여행지의 화사한 여자 여행객을 상상하는 데에도, 성폭행 피해자의 웃음을 상상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최근 ‘이야기’를 주목하는 경향 전반에 대한 느낌의 연장선에서) 본말이 전도된 것은 아닐지 의심해 본다. 그런 문학 작품을 읽지 않아서 세상이 이런 것이 아니라, 법이 공평을 가장하며 공감을 도려내고, 경제가 효용을 주장하며 연민을 묵살했기 때문에, 그런 사회이기 때문에 이토록 공감력이 떨어지고, 이야기가 빈곤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의심에 대한 대안도 결국은 다시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 목적은 결국 ‘공감’에 있음을, 본말이 뒤집히지는 말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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