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주말의 영화에서 타임 머신이란 영화를 처음으로 봤다. 말과 바퀴가 떨어져 나간 마차 같은 타임 머신과 흰 단체복을 입은 엘로이들 그리고 주인공이 미래의 도서관에서 가루가 되어버린 책을 부수며 절규하던 모습들이 기억에 남는다. 지하의 종족 몰록이 지상의 종족 엘로이를 잡아가는 장면은 아마 기억에는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였던 걸로 처리된 것 같은데. (원작이나 리메이크 버전의 식육이 아니었어도) 상당히 충격이었다. 내게는 그게 타임 머신이란 고전의 전부였고, 이후 다시 영화화된 리메이크 버전도 그 고전에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고전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어릴 때 집 떠난 아버지를 만나는 일과 같다. 다스 베이더처럼 '내가 원작이다'라고 나서는 고전을 만난 후에도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먼저 입주한 아류들이다.
하지만 타임 머신 원작에는 그 아류의 이미지를 압도할만한 새로운 서사와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서술되는 시간 이동에 대한 과학 이론은, '타임 머신'이 시간 이동이라는 소재를 신비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옮겼다는 평가에 걸맞게 상당히 흥미로운 이론들을 알기 쉽게 (혹은 속기 쉽게) 전개해 나간다. 아마도 그 당시 지식인들이 '사차원'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타임 머신' 발간 10년 후에 발표되는 특수상대성이론이나 그후 15년이 지난 후 발표되는 일반상대성이론과도 상충되지 않도록, 기본 수준에서 시간 이동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유도한다. 그 밖에도 영화와는 다른 엘로이의 외양에 대한 묘사들은 사뭇 충격이었고, 그 중에서도 주인공과 사랑하게 된 엘로이 위나의 이야기, 주인공이 경험하는 80만년 이후의 세계들은 영화가 선뜻 나가지 못한 자리까지 주제를 밀고 나간다.
영화가 오락성과 판타지를 강조하는 층위에서 묘사를 멈춘 데에서 더 나아가면서 웰스는 진화의 정점 이후에 다시 역진화를 진행하는 비관의 우주론을 제시한다. 역사의 진화 끝에 계급이 고립되고 이들 간의 투쟁이 소멸된 상태에서의 진화가 성취한 유토피아는 결국 다른 종으로 분화하고 종간의 먹이사슬을 이루면서 디스토피아로 급격한 상전이를 겪는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유토피아 보다 디스토피아로 기우는 것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생각해보면 유토피아를 그리는 서사를 만난 적이 있을까? 그럼에도 타임머신에서 흥미로운 것은 작가 웰스의 분열이다. 웰스는 미래에 대한 비관과 함께 웰스 당대의 지식이 인류 최고의 정점일지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건 타임 머신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진화의 끝을 확인하고자 하는 주인공과 여기에 투영된 웰스의 욕망과 정확히 쌍을 이루며 대척점을 만든다. 그것은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사회 제도와 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대한 자부심과 그 발전의 미래에 대한 질투어린 호기심과 예측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불안이 뒤섞인 탓이다. 그 분열과 혼란은 새롭지 않다. 지금 내가 두드리는 노트북도 바깥 도로 위를 질주하는 버스도 어느 한 순간 신기루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 문명과 문화를 우리는 견딜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함께.
웰스 스스로도 밝혔듯이 소설 자체로서의 완성도라기 보다는 소재와 세계관에서 파격을 보이는 소설인 듯 싶다. 그만큼 다양한 소재와 가치관에 노출이 된 요즈음의 독자들에게는 그리 어필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반면 함께 묶인 단편들, 특히 '맹이들의 나라'에서는 미디어와 소통에 관한 문제들, 그리고 정체성과 문명에 대한 문제를 간단한 설정으로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시 앞부분의 군더더기 문장들은 - 그 시대 작법의 관습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군더더기로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