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제국의 위안부

자카르타 2016. 1. 22. 22:13




'수출'일까? '수탈'일까? 뉴라이트계 어떤 인사가 일제에 의한 쌀 '수탈'을 '수출'이라고 해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빙신아 천 원하는 네 물건을 백 원에 가져가면 그게 수출이냐?' 댓글이 지적하듯이 식민지 상황은 '수탈'임이 자못 명쾌한 사실인 듯 하지만, 과연 그런가? 생각해 보자. 

쌀을 실어나른 배는 군함이 아니라 민간 업체의 배다. 그리고 선적을 주문한 것은 민간인 쌀 수출업자다. 수출업자가 도곡상에서 쌀을 살 때도 돈을 주고 샀다. 정주영 이병철처럼 이때 쌀장사로 터전을 세운 이들도 있으니 아주 후려친 건 아닐 게다. 그럼 도곡상들은 지주에게서 쌀을 가져올 때 강압적으로 했을까?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게다. 한 해 거래하고 말 게 아니었으니. 그럼 지주가 소작인들에게 쌀을 가져올 때 일본 순사나 군인들을 동원했을까? 아마 그것도 아닐 게다. 소작인들과 지주는 정해진 소작료에 준해서 냈을 게다. 물론 뼈빠지게 일을 한 소작인들에게는 쌀 대신 빚만 남게 되는 상황이었겠지만. 이때의 장부, 거래명세표, 소작농과 지주와의 계약서 등 식민지의 '수탈'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증거로 삼는 이런 것들은 모두 '합법적'이다. 이 뉴라이트 인사가 이런 얘기를 하면서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수탈이 이뤄진 거'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그러나 이 시대가 '수탈'의 시대임은 분명하다. '수탈'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농민의 쌀을 강압적으로 빼앗는 일본 군인'은 없지만. 소작인들과 지주들 사이에서 소작인들의 쟁의를 금지하고, 환율을 조정하고, 수입되는 일제 공산품과 '수출'하는 조선쌀의 가격을 조정하는 식으로 수탈이 좀 더 교묘하게 진행되었을 뿐이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도 위안부 문제를 같은 맥락으로 다룬다.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뉴라이트 등은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서 '(정부 혹은) 군에 의한 강압이나 불법을 조장하는 군의 지시'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위안부들을 (속여서) 모집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관리한 주체가 민간 업자들이라는 (그 중의 상당수는 조선인이다) 기록들을 증거로 내세운다. 이에 대해 <제국의 위안부>는 '설혹 민간 업자가 전면에 나섰다고 해도 그러한 수요를 만들고 부추긴 일본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두 가지다. 우선은 이 책이 '민간 업자가 전면에 나섰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기사에는 저자가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고 주장했다지만 그런 내용은 없다. 하지만 민간 업자의 거래 관계에서 한쪽 당사자로 위안부가 참여했다는 (그게 사기 행각이었더라도)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군이 아닌 민간 업자가 불법의 주체였다는 건 사실일까? 이 책이 근거로 드는 자료로 봐서는 상당히 근거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이 인용하는 책들은 일본 우익에 편향된 책이 아니라 정대협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출판한 <강제 1, 2, 3, 4, 5>권이다. 이 책에서도 많은 할머니들이 군이 아닌 민간 업자들에게 속아서 간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이 있음에도 정대협이나 우리 나라가 '15세에 군에 의해 끌려간 소녀상'을 위안부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위안부의 '완벽한 피해자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얼핏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태도로 보이지만 이런 단일한 이미지를 앞세우는 사이, 이것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기억이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배제되고 잊혀지게 된다. 고노 담화 후 일본의 민간 기금을 받은 60여 명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서울 정대협과 다른 입장을 가진 부산 정대협이 위안부 논의 과정에서 소외당하는 일 등이 그렇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명백하다. 더 참혹해야만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혹여 일본 우익의 말처럼 '자발적'으로 간 경우가 있다더라도 그런 구조를 만든 일본의 책임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들이 피해자임도 분명하다는 얘기다. 

'자발성'의 문제보다 더 <제국의 위안부>를 옭죄는 것은 아마 위안부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얘기일 게다. 저자는 역시 주로 <강제>의 기록들을 인용하면서 조선인 위안부들 스스로가 포로인 네덜란드 위안부나 점령지인 중국과 인도네시아 위안부와 어떻게 스스로를 다르게 생각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일본인 위안부와 점령지 위안부들 사이에서 좀 더 일본인 위안부에 가깝게 정체성을 지녔다는 얘기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분개를 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추측이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랬다는 사실이 이들의 '비참'을 희석시키는 일은 아닐 게다. 일제 치하에서 태어났고 내선일체의 교육 속에서 자라온 사람들이다. 생존을 위해 일본인처럼 행세를 해야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조정래의 <아리랑> 제일 마지막은 해방이 된 다음날 1945년 8월 16일 만주의 어딘가를 그리고 있다. 밤 사이 일본군들은 모두 소리 없이 도망을 쳤고,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조선인들이 남부여대 하고 두만강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그들 뒤로 뿌옇게 먼지가 일어났다. 중국인들이 곡괭이와 낫을 들고 조선인을 죽이겠다며 쫓아온 것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인을 자신들의 부역자로 썼다. 점령지인들에 비해 알량한 권리를 주면서. 압제를 당하는 중국인들이나 인도네시아인들이 보기에 일본군이나 조선인은 마찬가지로 보였다는 얘기다.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전선 쪽과 후방의 상황이 달랐고, 사람마다 달랐다. 어떤 위안부는 일본이 패망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방의 기쁨보다는 전표를 다 날리게 되어서 통곡할 수도 있는 거다. 저자는 이런 사례를 들 때마다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피해자성이나 일본의 잘못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라고. 

어쨌든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왜 굳이 이런 '달갑지 않은 기억'들을 끄집어 내는 걸까? 가장 큰 목적은 한일 양국의 화해를 위해서다. 90년대 초 위안부 문제가 처음 드러났을 때(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도 일본인이다), 일본 안에는 제국 시대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고노 담화는 그런 일본 내의 인식이 바탕이 된 것이다. 내가 처음 고노 담화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은 일본 내각에서 고노 담화의 내용을 부정하네 마네, 하는 얘기가 나오면서 부터였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뭔가 사죄의 뜻이 담겨 있었다는 얘긴가? 실제로 이 책에 소개된 고노 담화를 읽어보면 생각보다 솔직한 '사죄'의 표현이 담겨 있다. 그러나 당시 정대협이나 국내의 여론은 이 고노담화를 진정성 없는 것으로 폄하하고 이 담화에서 비롯된 기금을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오해했다는 얘기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기금이 네덜란드 쪽에는 어톤먼트(속죄)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었던 반면 우리쪽에는 '위로금'으로 번역이 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이런 오해로 어긋나기 시작해 앞서 얘기한 '기억의 차이들'이 논쟁의 중심이 되면서 이제 일본에는 혐한이 득세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 책이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도 있다. 다시 위에서 든 '수탈'의 예를 들어보자. 노동자들의 쟁의를 억눌러 저임금을 강요하고 노동력의 도시 유입을 위해 쌀값과 농산물 값을 억누르고... 이런 '교묘한 수탈'은 비단 일제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여전히 2016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은 됐지만 식민지의 매커니즘은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 저자인 박유하는 같은 맥락으로 지금 우리 곁의 위안부들-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을 가리킨다. 
인신 매매로 온 여성도 있지만 개중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떠밀리듯 온 여성도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국가가 증명서를 발급해 집단으로 위생 교육을 시키면서 관리하는 상황. 기지촌 여성들이 번 외화가 전후 재건에 큰 힘이 되었다는 얘기나 기지촌 여성들이 없으면 미군들에 의한 부녀자 강간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다는 어느 관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위안부를 실어날랐던 일본군의 매커니즘과 똑같다고 지적한다. 언젠가 우리는 미군 위안부에 대한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 저자인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벌금형을 받았다는 뉴스를 봤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이고 책을 덮어야만 했던 것은 이분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국가와 민족은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문의 리뷰를 쓰는 것도 실은 그런 부채감 때문이다. 부디 이 책의 진의가 제대로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감의 진화  (0) 2016.02.18
정의를 부탁해  (0) 2016.02.08
새 하늘과 새 땅  (0) 2015.12.08
분노  (0) 2015.11.30
궁극의 아이  (0) 201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