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소설을 역주행 중. <종의 기원>에서 밝힌, 사이코패스에 대한 작가의 탐구 여정이 궁금해서다. 기대와는 달리 <28>은 그다지 사이코패스를 중심에 놓지는 않는다. 박동해라는 인물은 정유정 작가가 사이코패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인물 – 박한상을 닮았다. 그리고 <종의 기원>에서 그의 패륜을 오로지 새로운 종의 본능의 탓으로 돌린 것과는 달리, 박동해의 본성을 자극한 부모의 삐뚤어진 양육도 짚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건 박한상과의 인터뷰를 담은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라는 책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기도 하다.) <종의 기원>과 비교하면, <종의 기원>에서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이 본성을 세심하게 관리하려고 했던 것과 대비된다. 이 본성을 인지하고 적절하게 대응을 했거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과민한 반응으로 억압하려고 했거나, 작가의 결론은 동일하다는 것도 흥미롭다. 사이코패스는 어쩔 수 없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고찰보다는 처절한 절망을 그리고 그 안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으려는 작가의 치열한 탐구가 단연 돋보인다. 어쩌면 그렇게 무정하게 인물들을 죽이는지, 어떤 장르적 관습도 부정하면서 독자의 허를 찌를 때는 진짜 사이코패스는 작가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했으면, 무엇을 바라보고 있어야 이렇게 관습의 유혹과 중력을 벗어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종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분명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책의 표지나 작가의 후기에 담긴 얘기들을 제하고 본다면 이들 작품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이미 분명한지도 모른다. 무간도. 전염병에 대한 치료 방법도, 사이코패스에 대한 대응책도 없는 세상. 그저 살려고 버둥대다가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하기 위해 동공을 한껏 벌여야 하는 절박함. 그걸 느껴보라고 들이미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