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기차가 멈춰선다. 창 밖으로 맨해튼 교외 한적한 마을 목조 이층집 잔디가 푸른 넓은 마당의 모닥불과 마주한 행복한 부부가 보인다. 기차가 속도를 더하자 풍경은 흘러, 노란 조명이 따뜻한 중산층의 거실이 되었다가, 멈추지 않는 기차가 허용하는 것은 고작 타인의 삶, 결국 타인으로 쪼그라든다. 레이첼이 투사한 전형을 삶을 살고 있는.
영화 전반엔 주인공 레이첼에게 혐오의 감정이 실린다. 그건 그의 행동이 어떤 정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저 집착과 면피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실을 드러내놓기 전까지는 관객은, 주인공이 추락한 자신의 본 모습과 마주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 과정에서 그가 받는 고통 자체가 정의라는 생각까지 하게된다. 하지만 영화의 절정에 이르면, 관객 스스로도 내 편견이 투영된 전형의 인물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레이첼이 보던 기차의 창의 프레임은, 그래서 영화를 담아내는 프레임의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속도가 빠를수록 우리가 보는 것은 그저 우리 욕망의 투영뿐.
연기도 연출도 모두 훌륭하지만, 한 가지 찜찜하게 걸리는 게 있다. 아무리 알콜중독이고 필름이 끊긴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정말 그런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를 수 있을까? 그간 만난 몇몇 주사가 심한 사람들을 보면 어김없이 일상에서도 폭력성을 예측할 수 있는 성향들이 드러났다. 그 폭력이 직위나 사무적인 태도에 가려있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감출수는 없었다. 적어도 자신만은 자기가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쓰다보니 그럴듯도 하다. 모두 속에 얼만큼의 분노를 쌓고 살아가지 않을까. 내가 어젯밤 필름이 끊겼을 때 누군가를 죽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노가 있지 않을까? 이 부분을 어떻게 다뤘는지, 소설을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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