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리
시크릿 가든에서 작가가 이룬 것은 기존의 사랑 이야기에서 좀 더 진일보한 갈등 구조를 만들어낸 데에 있다. 로버트 맥기에 따르면 사랑의 플롯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유력한 안타고니스트는 여자의 부모다. 맥기는 이런 플롯의 전통은 여전히 유효하고 영화 '졸업'의 예를 들면서 그 안타고니스트가 어떻게 진화하는지 (남자와 여자 어머니와의 삼각관계) 그리고 요즘처럼 부모가 자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시대에 있어 사랑의 방해자는 어떻게 진화해야할지를 묻는다.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과 하지원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아직 4편까지 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건 현빈의 자의식이다. 현빈의 계급 의식이 하지원에게 다가가는 것을 방해한다. 현빈의 어머니나 김사랑의 존재는 그에 비하면 사건을 복잡하게 하는 서브 플롯을 형성할 뿐이다. 이것이 새로운 성취로 느껴지는 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건 솔직한 고백과도 같다.
우리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사회의 통념이나 가족의 속물 근성이 아니라 사실 그것들은 그저 알리바이에 불과했다는 당돌한 고백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모든 사랑의 방해는 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실효성 있는 억압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닌가? 가족이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할 때 명예 살인을 당할 수 있는 일부 이슬람 국가가 아닌 바에야 사랑의 방해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과 솔직히 마주하고 있다고 본다.
'에크리 -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을 읽으면서 시크릿 가든을 떠올린 것은 라캉이 복잡하게 펼친 대타자, 소자아 등의 개념들 때문이다. 아직도 어지럽기만한 이 개념들이 어렴풋이 남기는 인상은 모든 주체를 만드는 언어와 그 언어화의 작업에서 발생하는 오역으로 인한 빈자리(소외, 삭제)의 갈등이다.
사람은 마치 질긴 고무로 만든 풍선 안에 들어있어서, 외부의 - 라캉이 말한 '실재'의 자극은 항상 풍선의 고무를 뒤집어 쓰고 주체에 간섭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 우리가 사랑의 플롯에서 설정해 놓은 다양한 안타고니스트들도 실은 그 실재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간섭이 주인공 안에 어떤 부조를 형성하고 있는지에 달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부조는 결국 자신이 두른 외피(풍선의 고무)에 따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라캉이 말한 무의식의 원인인 언어라는 것도 나를 두른 그 풍선의 고무가 아닌지.
상당한 오역을 하면서 책을 덮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째 라캉에 대한 책들을 맴돌고 있는 이유는 라캉이 얘기한 시니피앙의 연쇄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갱신이 시나리오의 구조에 대한 성찰을 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때문이다. 아마도 상당기간 라캉에 대한 오독이 계속되겠지만 불완전한 언어(시니피앙)과 의미 생성 - 라캉이 말한 '사후 작용'은 요즘 시나리오의 의무 조건과도 같은 '반전'을 만들어내는 매커니즘에 대해 상당히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