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그레이 (2012)
The Grey
7.8
글쓴이 평점
사람이건 영화건 기대를 배신하면 오히려 미움을 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배신에도 다 나름 이유가 있음에, 그걸 찾아 다독이고 보면 할 말이 별로 없다.
'더 그레이'도 그런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잔뜩 조여오는 긴장감에 '약효 그만'이라며 좋아라 했지만 그 마뜩치 않은 결말에 앞의 짜릿함은 이미 효력 상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참 '이야기'란, '영화'란 어려운 것이구나 싶다. 마치 내 본의가 아닌 삶을 살게 된 것이지만 그 삶을 영위하는 데에는 본인의 의지, 책임, 주위 사람들과의 합의가 따르는 것처럼, 영화의 설정과 소재를 정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지만 쉽사리 끝낼 수 있는 것도, 그 방향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느낀다.
'더 그레이'는 주인공 오토웨이의 고뇌에 찬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아내는 미루어짐작컨데 지금 그와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멀리 떨어져 있고 오토웨이는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 다음 날 그와 몇몇 인부들을 고향으로 데려갈 비행기는 폭풍우 속에 설원으로 추락을 하고 만다. 승객 대부분이 죽고 살아남은 것은 오토웨이를 비롯한 일곱 명의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늑대의 무리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늑대들은 오토웨이 일행을 하나 둘 죽여나가고 졸지에 야생의 먹잇감이 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탈주를 벌인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면 영화는 애초에 관객이 가졌던 '어떻게 탈주를 성공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배반한다.
감독은 이런 결말을 통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을까? 그저 야생과 문명의 계급장을 다 떼어낸 인간의 사투를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투에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자연을 이긴다 혹은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메시지는 너무 식상했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게 끝났다고 해고 내가 만족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이런 소재와 설정에서 감독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자꾸 죽은 자식 뭐만지듯 만지작거리고 싶은 이유는 뭘까?
왜 감독은 조난 직후 구조대의 존재를 궁색한 대사들로 부인하면서 인물들을 숲으로 인도했을까? 그게 석유회사들의 유명한 행태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결말에서 주인공의 판단을 뒤집는 결말에 이르면 연출의 작위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중후반까지 숨은 영웅의 모습으로 보이던 오토웨이의 무력한 모습에 이르면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는 과연 무엇일지 의문이 든다.
에로스의 잔영인 문명과 그 문명의 자화자찬인 영웅담에 질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 말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또 무엇일까? 그저 자연 앞에 이렇게 무력한 그저 머리속만 산란한 인생들의 이야기?
우리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영화를 찾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닐까? '다 알아. 그럼에도 우린 다른 얘길 듣고 싶은 거야.'
인터넷의 뉴스와는 다른 얘기들. 그게 아니라면 네셔널지오그래픽을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