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2월 11일

자카르타 2012. 2. 11. 15:54

시간 1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 잠언 6장 9절 ~ 11절


시간은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자원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을 가장 효율성있게 활용하는 것이 부의 축적의 근간이라는 생각은 서구 사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테일러와 포드가 노동을 시간과 이익의 함수로 관리하게 된 것도 그들의 독창이라기보다는 이런 사상의 전승 탓이다. 


기독교는 당대의 부를 하늘의 축복의 증표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누릴 자격이 실은 근면에 있음을 강조한다. 사회주의는 이런 신화에 대한 타당한 반박을 찾는 집요한 관점이다. 오늘 Be on Degi에 대한 반박글에서 누군가 노숙자의 불성실, 나태를 지적했듯이 이러한 신화는 인간이 최소한 누려야 할 긍휼을 무시할 강력한 근거가 된다. 


시간에 풍화되는 것이 자연의 숙명이라면, 문화는 그 숙명을 거스르려는 의지다. 시간에 의해 풍화되는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야만 문화는 유지된다. 그래서 게으름은 거의 모든 문명에서 죄악시 된다. 시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이 풍화를 거스르는 이야기로 환원된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그의 사후에 시간 여행을 통해서 그의 아내를 찾는다. 자연이 부여한 운명을 거스른 그의 행보에 아내는 끝도 없는 기다림의 고문 혹은 희망 속에 사로잡힌다. 헐거운 플롯에도 이야기가 깊은 잔영을 남기는 것은 그 균열이 남긴 잔향이 사람들의 공유한 집단 무의식 - 시간이 갖는 한계에 이야기가 부여한 균열 때문이다. 


시간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시간의 거세고 도도한 물결과 그를 거스르려는 인간의 투쟁을 그리는 것이 타당한 전략이 아닐까? 한계와 그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 이것이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그 캔버스에 밑칠을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 뒤에 그 몸부림의 동인을 주제로 삼는 것이 타당한 순서가 될 듯 싶다. 그런 면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타임 리프의 동인으로 사춘기의 설렘과 불안을 잘 끄집어 냈다. 반면 '인타임'은 그저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는 테일러-포드 주의의 은유를 소재로 삼는 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그럼 시간을 적립하고 인출할 수 있는 은행이 있다는 설정에서 우리는 무슨 얘기를 - 무슨 한계와 투쟁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계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마치 연어가 생명을 담보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이모가 했던 얘기처럼 누군가 자신이 지워버린 과거의 결과를 옴팍 뒤집어 써야하는 일이 생긴다. 인타임에서는 영생을 대가로 자본의 노예가 되어야만 했고. 

아마도 시간 은행이라면 불평등을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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