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문에 따르면 <생활의 발견> 마지막 장면은 김상경이 슈퍼맨처럼 팔을 뻗고 추상미의 집 앞 골목을 저공비행으로 나오는 버전을 찍었다고 한다. 영화 중에 '회전문'인가? 어떤 전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거기서 나오는 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얘기였다. 끝내 그 버전을 보지는 못하고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어제 <하하하>를 보면서 그 얘기가 떠올랐다.
김상경에게 문소리가 '살찐 뱀'같다는 얘기를 했다. 내 느낌엔 김상경 보다는 홍상수 감독님이 딱이다. 슬리퍼를 끌면서 교정을 어슬렁 거릴 때의 모습은 영락없이 뱀이다. 몸의 온도는 낮출 수 있는 대로 낮추고 먹이를 탐지하는 혓바닥을 끊임없이 놀려대는. 김상경이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얘기에는 조금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그 이미지를 투사하려고 했다는 혐의가 짙어지는 부분이다.
요즘 연달아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는 중인데 주야장창 나오는 대사들이 있어서 재밌다. '너는 너무 예뻐, 세상에서 제일 예뻐, 제일 똑똑해' 주인공들이 여자를 꼬실 때 쓰는 멘트는 <북촌방향>이나 <다른 나라에서>를 이어 (실은 여기서가 더 먼저이고, 또 이제 볼 그에 앞선 영화에서 또 나올지 모르겠으나) 이 영화 <하하하>에서도 나온다. 그 뿐이랴? 이건 감독이 옷을 갈아입힌 똑같은 캐릭터들이라 생각이 들게 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하하하>는 내가 본 중 가장 내 취향에 맞는 영화다. (어디까지나 내 취향이지만) 두 인물의 회고담이 톱니처럼 맞물리면서 결국의 하나의 이야기를 그려간다. 실은 하나의 이야기여도,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 얘기다. 그 안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사실 그 앞뒤의 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새로운 형식이 상당히 영화스러운 기교를 보인다. 그러면서 반면에 '영화스러운 기교? 별거 없지 않나? 결국은 내가 얘기하려던 사람과 관계의 얘기로 다시 돌아오지 않나?' 그런 감독의 자부심이 읽히기도 한다.
사실 그렇다. 김상경이 하는 얘기와 유준상이 들려주는 얘기가 교묘하게 합을 이루고, 또 둘의 이야기가 하나의 사건으로 봉합이 될지 안 될지가 장르 서사의 관습에 익숙한 관객(나 같은)에게는 어떤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되기는 하지만 그건 사실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마치 우디 앨런의 <멜리나와 멜리나>에서 같은 이야기의 희비극 버전을 보여준 것처럼 홍상수 감독은 하나의 서사에서 두 개의 이야기를 뽑아낸다. 우디 앨런과 다른 게 있다면 두 개의 이야기가 또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 뿐.
그렇다고 기존의 서사를, 약간의 형식만 바꾼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본 캐릭터 중에서 가장 색다르고 재밌는 캐릭터가 나왔다. 예지원과 김규리가 기존의 홍상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인물이라면, 문소리가 연기한 인물은 또 낯설면서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반면 김상경은, 그 연기 내용이 워낙에 어려운 - 아래 사진처럼 이순신 장군을 만나는 등- 것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상당히 어색했다. <몽타쥬>에서도 그런 걸 느꼈는데 이유가 뭘까? <살인의 추억>에서 본 것처럼 그 자신에게 딱 맞는 연기를, 아직 못 본 것 같다.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