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밤과 낮

자카르타 2014. 1. 26. 19:42


밤과 낮 (2008)

Night and Day 
7.8
감독
홍상수
출연
김영호, 박은혜, 황수정, 기주봉, 김유진
정보
드라마 | 한국 | 144 분 | 2008-02-28
글쓴이 평점  



아, 지친다. <밤과 낮>에서도 숫컷의 껄떡질은 계속된다. 끝내 마음을 얻고는 다른 영역을 찾아 떠나갈 이유가 생기고 만다. 김유진이 연기한 오래전 연인에게는 성경을 들이대며 거부한다. 반면 그 유진이 경멸하는 박은혜에게는 끈질긴 구애를 펼친다. 애초에 유진을 거부한 것이 도덕 때문이 아니라 그의 남편을 의식한 소심함 때문이고, 그에 비하면 박은혜에게는 그런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박은혜가 남의 포트폴리오를 표절한 뒤 그의 구애 공세가 더욱 거세진 것은 아마도 그런 비겁한 성향의 또 다른 면일 수도 있다. 역시 찌질하고 비겁하고 우유부단하고 그러나 '착한' 인간을 그럴 듯하게 묘사해낸다. 


왜 감독은 이런 인물에 집착하는지 의문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과연 잘 알고나 하는 걸까, 홍상수 만큼 자신이 하는 얘기를 잘 아는 사람이, 알게 된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뭐 그걸 관객이 10년 넘게 따라가면서 봐야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다행히 형식상의 실험(이라기 보다는 내가 보기엔 그냥 다양한 옷을 걸쳐보는 정도인 것 같지만)을 전개하고 있으니 다른 소구력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박은혜의 캐릭터는 또 다른 유형을 보인다. 뭔가 허세에 가득차 있고, 그 허세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내면에 따르는 불안은 다른 캐릭터와 비슷하지만 (유진의 말처럼) 현실적이고 속물스러운 - 또 이렇게 쓰고 보니 다른 캐릭터의 반복이다 싶기도 하지만, 억척스러운 생계형 인간의 뉘앙스가 가미되었다는 의미에서 -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래도 간만에 영화판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 가까운 미술판의 이야기이지만 - 이야기를 본 셈이다. 하여튼 대단한 분이다. 홍상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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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독의 작품을 집중해서 보다보니 영화를 보지 않는 중에도 뭔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앞서 리뷰 쓰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도 몇몇 떠오르고. 캐릭터나 서사에 변화가 거의 없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몇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선 서사에서 기존의 연애담이 그렇고 그런 강도의 해프닝을 나열한 것에 불과했다면, 그래서 그 해프닝의 결과가 어떤 여파를 남기지 않았던 데에 비해 이번 작품은 좀 더 심각해 진 게 사실이다. 유진과의 두번째 재회에서 여섯번의 중절을 얘기하듯이 박은혜와의 관계도 (그게 사실인지는 명확지 않지만) 중절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끝이난다. 게다가 유진의 자살은 이제까지 홍상수의 캐릭터가 저지른 실수의 가장 지독한 결말이 아닌가 싶다. 


홍상수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이 모두 홍상수의 페르소나인 것은 아니다. 최근에 자주 나오는 이선균도 홍상수의 페르소나라고 하기에는 뭔가 다른 지점들이 있다. 오히려 김태우나 정보석에서 시작한 캐릭터의 유형은 최근에 문성근처럼 영화 속에서도 나이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김영호는 그런 면에서 특이한 캐릭터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도 아니고, 그 페르소나의 뒤를 잇는 다음 세대(?)의 캐릭터도 아니다. 좀 더 동떨어진 외부 세계에 보낸 보이저호와 같달까? 좀 더 다른 서사, 다른 결말의 가능성을, 이미 캐릭터 안에서 담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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