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첩첩산중>은 뒤에 나올 <옥희의 영화>의 또 다른 에피소드에 들어가도 전혀 문제될 게 없을 만큼 설정이나 인물이 똑같다.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구나, 싶을 만큼. 정유미의 캐릭터는 옥희보다는 좀 더 개성이 뚜렸하다. 어제 오늘 본 영화들이 주로 그렇다. 다른 영화들은 홍상수 감독이 여자를 그저 대상으로만 본다거나, 남자의 욕망이 투사되는 스크린에 불과하다거나 그런 비판을 들을 소지가 다분했었는데 어제 오늘 본 <옥희의 영화>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나 <첩첩산중>에서는 오히려 남자들이 박제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첩첩산중>의 정유미는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생동감있었던 듯. 아무튼, 홍상수 감독님 날로 드시네, 그런 생각.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 프로그램에서 만든 영화라 일본 감독의 <코마>와 필리핀 감독의 <나비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와 <첩첩산중> 단편 셋을 모아놓은 영화다. <코마>에서 보이는 일본 시골 풍경은 정말 신령의 전설이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유품을 전해주러 간 곳에서 손자 손녀들의 교감을 다룬 영화다. 처음에는 시골 부부의 딸인 하쯔코가 신령의 환생인줄 알았다능. 그만큼 신비한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하쯔코와 정준일의 교감은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 마지막 하쯔코의 대사들은 더더욱. 개구리를 선물하는 장면이 좋았다. 내 시나리오에서 그렇게 공간과 맞물리는 일상을 포착한 장면이 얼마나 될까?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나비는...>에서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옛 친구가 고향으로 여행을 온다. 금광이 폐광된 후 유령 마을이 되어버린 고향의 인심은 각박하기 그지없다. 옛 친구들은 모두 가난 속에 허덕이고 마사가 말하는 '예전에 함께 놀던' 때로 돌아갈 수가 없다. 마사는 그저 그 친구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요란하게 눌러댈 뿐이다. 고향에 남겨진 마사의 친구 윌리와 그를 돌보는 남자들은 마사를 납치해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가난으로 황폐해진 관계에 대해서 명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흑백 톤의 심하게 화질이 나쁜 영상은 몰입도를 떨어지게 하지만 극의 전체 톤과는 상당히 잘 맞아 떨어진다. 그래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프러덕션 디자인을 풀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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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후 리뷰
홍상수의 페르소나는 누구인가? 생각해보다가... 홍상수의 페르소나는 이선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성근과 함께 늙어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첩첩산중>에서 이선균을 비난하고 시기하지만 <옥희의 영화>에서는 문성근이 아차산 화장실에서 옥희를 웃으며 바라보는, 그 시선을 얻기 위한 과정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