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람들은 이런 소재가 재미 있을까? 그들도 이 영화처럼 일년 중 하루는 폭력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긴 미국인들만의 얘길까? 우리 뉴스를 채우는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들을 보면 우리 사회도 얼마나 폭력이 만연한가? 증오 범죄에는 얼마나 취약한가를 알 수 있다. 약한자들이 다시 약한자들을 괴롭히는 사회. 마치 닭장 속의 닭들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서로의 머리를 쪼아대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서 어떤 배경으로 퍼지 데이를 설정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최근 본 영화 <다이버전스>에서도 체제가 바뀌게 된 것은 그저 '지도자의 결단'이고 그 결단을 수용하게 만든 역사가 있다. 인류가 파국에 다다른다는 것. 이 영화의 중요한 설정인 '퍼지 데이'도 그런 파국을 거치면서 수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그러 파국을 거치게 될까? 파국을 지난다면 이런 해결책을 선택하게 될까? 그건 모를 일이다. 하긴 지금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진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마음껏 착취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가? 만연한 퍼지 데이를 살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도 간간히 그런 뉘앙스를 보인다. 이 폭력의 배후가 바로 빈부 양극화에 있음을.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모두 사라질 때, 차별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고 양파 껍질처럼 다시 제일 바깥의 껍질을 향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 가정을 향해 총을 빼어든 중산층들은 일종의 자경단인 셈이다.
플롯으로 치면 이 영화는 어떤 플롯에 포함되게 될까? 야만의 힘이 평온한 가정을 휩쓴다는 면에서 '희생자의 플롯'이 될까? 주인공은 그 야만의 힘에 굴복해 가정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힘의 야만성을 깨닫고 저항에 나선다는 얘기다. 그리고 단순히 그 저항 과정에서 액션 영화에 그치지 않기 위해 약간의 반전을 마련해 둔다. 앞서 얘기한 양파 껍질들을. 야만의 폭압 후에 이어진 문명의 빛은 잠시나마 휩쓸린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마치 <파리대왕>에서 아이들이 자신들을 구조하러 온 어른을 만난 것처럼. 그 어른이 눈을 돌리는 순간 아이들은 언제 무기를 집어들지 모른다. 이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불편한 결말을 가져온다. 야만의 시간 - 퍼지 데이를 마련한 권력은 여전하다. (그래서 2편을 암시하는지 모르지만)
야만의 힘에 저항하는 희생자의 플롯이라고 하기엔 그 야만의 힘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맹점이기도 하다. 후속편이 나온다는데 좀 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로 바뀔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