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학생들이 신입생을 교육시키는 것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영락없이 군대에서 하던 방식의 얼차려다. 그 선배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상상해 봤다. 아마도 경찰 조직의 특수성-조폭 못지 않게 일사분란한 조직력이 있어야 한다는둥-에서 비롯된 여러 이유를 댈지도 모르겠다.
남의 얘기 할 것도 없이 내가 겪은 모든 폭력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학교 선생들은 그걸 보고 ‘사랑의 매’라고 했고, 군대에서는 ‘군기확립’을 해야 여러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공수 훈련을 받을 때는 이주 내내 ‘앞꿈치 무릎’을 외치면서 맨바닥을 굴렀다. 조교는 그랬다. 다리에 힘을 빼야 착지할 때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다고. 미친소리다. 전쟁 나도 이렇게 다리 힘을 빼놓고 전선으로 보낼 건가?
모든 폭력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폭력의 탁월한 즉효 때문에 다른 대안은 고사되기 마련인지라 그 폭력만이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목표로 삼은 것이 음악의 세계처럼 가치 있는 경지라 할지라도 폭력은 폭력이다. 마지막 엔딩에서 주인공과 그를 괴롭히던 선생이 음악 안에서 교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내게 어떤 감흥도 주지 않는 것은 그게 대부분, 폭력의 효용을 입증하는 증거로 인용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무수한 플래쳐들은 이 영화를 또 그렇게 볼 게다.
플래쳐에게 묻고 싶다. 과연 찰리가 심벌즈를 맞지 않았다고 버드가 되지 않았을까? 그보다 버드가 되기 전에 악기를 버린 찰리는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당신의 세계와 경로를 강요할 권리는 누가 부여했는가? 첫 장면부터 감독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하며 시작하더니 그저 재수없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