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폴 리쾨르의 <악의 상징>을 읽고 그의 다른 책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시간과 이야기>라는 책이 3권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구입하게 되었다.
1부와 2부가 담긴 1권은, 하지만 독해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부 1장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어야 했고, 2장을 위해서는 <시학>을 다시 읽었다. 3장 역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어야 했다. 어찌해서 1부의 논제들은 대충 윤곽을 잡기는 했는데 다양한 이론들의 쓰나미가 몰려오는 2부는 손 쓸 도리 없이 그냥 이해하든 못하든 본문 페이지만 넘길 수 밖에 없었다. 하여 2부의 대부분은 감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넘어 갔다.
1부 1장에서는 <고백록>에서 얘기한 시간성을 다룬다. 아마도 저자는 시간이라는 화두를 통해 역사 서술과 허구의 이야기 서술의 관계를 모색하려는 모양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정의, '시간은 영혼의 이완'이라는 정의를 통해 저자는 객관적인 물리량으로서의 시간이 아닌, 체험자의 주관에 따른 시간으로 앞으로 전개되는 논의를 제한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같다'이다.) 이렇게 요약을 하기에는 84페이지나 되는 분량은 어마어마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역시 유럽의 지성사는 과거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과거의 이론을 뒤엎는 새로운 이론으로 세대 교체를 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왜 굳이 수천 년 전의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정의를 빌려와야 하는 걸까? 그냥 저자의 생각을 밝히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냥 속수무책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1부 2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주요 개념인 '미메시스'를 다룬다. 저자는 미메시스가 단순히 모방이 아닌 창조적인 재현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먼저 존재하는 어떤 것의 모양과 행동을 베껴오는 게 아니라 새롭게 구성한다는 뜻에서 '뮈토스' 혹은 '플롯팅'과 상통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메시스는 곧 뮈토스였던 셈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미메시스에 대한 통념의 정의 - '모방'을 완전히 폐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방'으로서의 미메시스를 '창조적인 재현'으로서의 미메시스의 상류로 두고, 다시 그 하류로 독자의 수용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미메시스의 의미를 부가한다. 이렇게 미메시스의 세 가지 층위를 마련한 저자는 이를 근거로 역사 이야기의 서술 방식으로 넘어간다.
2부는 세 가지 장으로 구성된다. '이야기의 쇠락' '이야기를 위한 변론' '역사의 지향성'
논의는 역사와 허구를 대립되는 관계로 보는 시각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는 동떨어진 사건들에서 인과성을 찾아내고, 사건들의 행동의 주체를 밝혀내면서 이야기의 서술을 닮아간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여기도 역시 '같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 구조주의의 영향으로 역사 변화의 구조에 대한 집착이 크게 주목을 받았던 모양이다. 저자는 역사 모델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이 부분부터 정확히 저자가 하려는 얘기가 무엇인지? 그 모델링이 이야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파악이 안 된다.
일단은 내가 이 분야 - 역사학의 이론들에 대해서 아주 무지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난삽한 번역도 상당히 큰 몫을 차지한다. 저자가 3권에서 국내 하이데거의 번역본을 보면서 느꼈다는 그 기분을 나도 느꼈다니 이 부분에서는 저자와 같은 기분이다. 도대체 국어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 번역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번역 투성이다. 일반명사를 놓고 그 뒤에 대명사가 이어지는 본문과 달리 관계대명사를 풀어 쓰느라고 대명사가 일반 명사보다 먼저 나오지 않나, 한 단어를 같은 페이지 안에서 퇴행이라고 번역했다가 역행이라고 번역했다가 거꾸로 가기라고 번역을 하지 않나.
그리고 저기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 한 '영혼의 이완'도 사실 '영혼의 분산'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이해가 빠르다. 시간은 주체의 관심이 흩어지면서 생긴다는 뜻이니. 이런 번역이 이 책을 읽는 데 더욱 큰 걸림돌이 된다. 괴로운 독서라 나머지 2권, 3권은 그냥 책꽂이에 넣어둘까 하다가 서문을 다시 보니 2권은 다른 공역자가 번역했다고 하니 다시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