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동창을 만난 기분이랄까? 블랙리스트 1화 첫 씬에서 제임스 스페이더를 보고 든 느낌이야. 낯은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옛날에 꽤 친했던 거 같은데... 암튼 인터넷을 뒤져서 그의 젊은 모습을 보고서야 무릎을 쳤지. 아, 이 배우였네. 세상에 역변도. 역변도. 순정만화에서 그대로 나왔을 것 같은 날렵한 선하며, 그러면서도 뭔가 변태스러운 이물감에, 볼수록 정은 안들지만 참 묘하다 싶은 배우였는데... 그건 <트윈픽스>의 카일과는 다른, 뭐랄까 유약하면서도 왠지 끝까지 살아남아 잿더미가 쌓인 벙커 투껑을 열고 나올 것 같은 이미지랄까? 뭐 암튼 그랬었는데. 진짜 장하게 살아남았구나! 그것도 후덕한 대머리가 되어서 말야.
내가 무심했던 거지 알고보니 블랙리스트 시즌1이 나온 뒤에 이러저러한 상도 많이 받았더라고. 그도 그럴 것이 매회 블랙리스트에 오른 범죄자를 하나씩 곶감 빼먹는 드라마가 뭐 대단하다고 잠자리에서 와이파이를 잡느라 팔이 아프게 핸드폰을 휘젓고 있었겠어. 그게 다 제임스 스페이더의 눈빛 때문이지. 도대체 킨 요원이 레드의 딸인 거야? 아닌 거야? 킨의 남편 톰이 나쁜 놈이야? 레드가 나쁜 놈이야? 전형적인 낚시질이지만 레드를 연기한 제임스 스페이더가 킨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릴 때면, 딸을 딸이라 하지 못하는 홍길동 같다가도 - 아 그러고 보니 중절모는 딱 벙거지 같네 - 끝까지 이기적인 스파이 같기도 하고 참 그렇단 말이지.
킨의 연기야 뭐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으니 잘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자주 나오는 우는 장면을 볼 때면 그래도 우리 나라 배우들이 컷에 맞춰서 또르르 눈물 굴리는 연기는 참 잘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데, 제임스 스페이더의 경우에는 냉혈한인데도 어떻게 그렇게 풍부한 감성을 보여줄 수 있는지 참 대단한 배우다 싶어. 매회 진행되는 개별 에피소드들도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뻔한 결말을 살짝 뒤집어서 긴장감이 느껴지게 하는 재주는 정말 대단한 거 같아.
요즘 미드는 저렇게 긴가 싶게 드물게 22화까지 가는 이야기인데 - 뭐 그래도 여전히 메인 플롯은 미결이지만 - 지루한 줄 모르고 봤네. 중간에 줄리를 연기한 여자도 에바 그린을 닮아 묘한 매력이 있고 말야. 일찍 죽어서 아쉬웠어. 생각해보면 그냥 정말 낚시용 캐릭터인데, 어쩌면 그렇게 다채로운 인간을 만드는지. 지금 시즌 2로 넘어갈지 목하 고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