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책

미스터리의 계보

자카르타 2016. 5. 11. 19:33





연초에 읽은 <악의 교전> 얘기부터 해야겠다. 이 소설의 파국에서 사이코패스인 주인공은 자기 반 학생들을 학살한다. 그 전까지 용의주도하게 살인을 해오다 예기치 않은 살인을 하게 되자, 주인공은 '시체를 숨기기 가장 좋은 곳은 시체들 사이'라며 학살을 결심하게 된다. 이 섬뜩한 발상은 주인공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이코패스임을 또 한번 증명하는데, 사실 기시 유스케의 창작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앞서 (아마 원조라고 생각되는데) 체스터튼이 만든 '브라운 신부'의 대사다. 그렇다고 해서 기시 유스케의 창의력이 조금이라도 빛이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 구절에서 학살을 상상하고 구체화하는 것은 오로지 기시 유스케의 창의력이라고 생각했었다. <미스터리의 계보>를 보기 전까지는. 


<미스터리의 계보>는 (일본으로 치면) 패전 전 일본에서 벌어진 엽기 혹은 불가해한 사건 세 가지를 다룬다. 첫번째 '전골을 먹는 여자'는 딸을 죽여 전골을 해 먹은 여자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두 명의 진범'은 살인 사건 하나를 두고 검찰이 단독범으로 두 명을 기소한 사건을 추적한다. 세번째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은 한 마을에서 한 시간 동안 서른 한 명을 학살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맞다. 세번째 이야기를 보는 즉시 <악의 교전>이 떠올랐다. 실제 기시 유스케가 이 사건을 참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상상력의 재료는 충분히 되었을 게다. 현실의 자장을 벗어난 창의력은 그만큼 드물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미스터리의 세계의 별과 같아서 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 어느 곳에서나 만나게 되는 작가. 미유베 미유키가 이 책의 저자 마쓰모토 세이초에 대해 내린 평가다. 40대의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해 80세에 죽을 때까지 100편의 장편, 천 편의 단편을 쓴 작가라고 한다. 그의 필력도 숨막히게 하지만 그가 이 책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기시 유스케를 비롯해 다른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사건을 밀착해 추적했지만 세이초 스스로는 천 여 편이나 되는 자신의 소설 목록에는 이 사건들을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책의 말미에 평론을 적은 조영일은, 세이초가 일관되게 작품에서 그리려고 했던 인물은 돌연변이처럼 돌출된 특이한 캐릭터의 인물이 아니라 '정상인으로서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다가 본의 아니게 짐승의 길로 접어든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그가 탐구한 것은 어떤 극한에 몰렸을 때 인간이 극단의 행위를 선택하게 하는 '동기'였다는 얘기다. 결국 그 '(사회적) 동기'의 유무에 따라 우리도 살인자가 되거나 정상인으로 남을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이초가 소설이 아닌 이 책과 같은 논픽션을 다룰 때 캐릭터의 엽기와 기괴함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거리를 두면서 이런 사건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역사와 사회 맥락을 꼼꼼히 분석한다. '배경이 평범할수록 이야기의 비참함은 고조된다. 무대가 단조롭기에, 드라마가 보여주는 자극은 희석되지 않고 박력을 띠어 간다. 담담하게 서술하며 단순하게 구성된 문장으로 기괴한 내용을 전달할 때 활자의 행간에서 무시무시한 박진감이 솟구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이초가 자료로 삼은 경찰 조서를 두고 한 말이지만, 이 말은 이 책 <미스터리의 계보>를 채운 세이초의 문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름 사회파 미스터리 팬이라고 하면서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을 이제껏 몰라봤다니 부끄럽다. 그의 단편 선집-미야베 미유키가 편집한-과 그의 자서전, 창작론 등이 나왔다고 하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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